[시민건강연구소 서리풀 논평]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넘어

[라포르시안] 다시 5월이 돌아왔다. 한때 부르던 이름도 있지만,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무슨 무슨 ‘날’로 가득한 달이다. 누구는 그 날을 기다리고, 다른 누구는 영 부담스러우며,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의식도 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이제 ‘친밀성’은 껍데기만 남은 것 같다. 처절하게 자본주의로 편입되고, 완전히 상품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몸집을 불린 시장만 힘이 세다. 관심과 사랑과 돌봄을 표현하는 길은 ‘돈’ 한 가지로 통일된 지 오래다.

이 모든 ‘관계’를 떠받치고 있는 것, 적어도 5월의 토대는 가족, 그것도 ‘정상가족’에 대한 공고한 규범 또는 이데올로기다. 그 규범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 이를 욕망한다고 생각하게 할 만큼 힘이 세다. 영혼에다 무의식까지 가 있을지 모른다.

‘정상가족’의 따옴표는 하나지만, 실은 둘이다. ‘정상’과 ‘가족’을 따로 구분해야 한다.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오늘 이 따옴표는 이 말이 특정한 의미를 내포하고, 특정한 방향으로 해석되며, 한쪽으로 치우치는 어떤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표시하려는 기호이다.

‘잘한다’ ‘좋다’ ‘이상하다’ 등등, 뭐라고 표현하든 어느 시절, 어느 곳에서나 같은 뜻이 아니다. 사람들이 늘 그렇게 살았던 것도 아니다. 보편타당도 진리도 아니니, 그냥 이 시대 한국 땅에서 바글거리며 사는 사람들, 그것도 대놓고 표시하는 일부의 전유물이라 생각하면 맞겠다.

먼저 ‘정상’이라는 말. 길게 말할 것도 없이 폭력이고 억압이다. 당장 장애, 성소수자, 일부 질병은 끈질기게 ‘비정상’이다. 키가 어떻다느니 머리가 좀 이상하다느니, 어떤 신체와 정신조건도 빠지지 않는 정상성의 판단대상이다.

따지고 보면, 젠더와 성이 가장 오래 정상 이데올로기의 대상인지도 모르겠다. “어디 여자가...”라거나, “...답지 못하다”라는 규정. 말이 사람을 만들고 행동을 제한한다. ‘정상화’하는 힘이다. 도대체 그 정상화는 누구의 무엇을 위한 정상화인가?

과거처럼 노골적인 것은 아니지만, 아슬아슬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비혼이나 나이. 그리고 노동과 계급, 지역, 인종은 훨씬 더 은밀하게, 그러나 언제라도 정상성의 폭력에 노출될 위험을 안고 있다.

‘정상’은 단지 부담이나 압력을 넘어, 억압하고 차별하고 배제한다. 어린이날에 끼지 못하는 아이와 어버이날에 전화 한 통 받을 일 없이 홀로 사는 노인을 생각해 보라. 그들에게 가족과 결혼과 돌봄을 압박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고 어떤 결과를 빚어내는지.

다음은 ‘가족’ 차례다. 이것도 이미 우리가 아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모습, 가족과 가족 ‘제도’의 의미, 의무와 책임, 가치까지. 이 시기 한국 땅에서 굳어져 불변일 것 같지만, 그 또한 한때 지나가는 모습일 뿐이다.

모계사회니 무슨 혼인 풍습이니 하면서 멀리 갈 것도 없다. 그 짧은 시간에 우리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30년 전 가족과 지금 가족을 누가 같다고 하겠는가. 대가족은 해체되고, 부-모-아들-딸로 구성된 4인 가족 이미지도 허물어진 지 오래다. 하물며 부양이나 돌봄과 같은 내용에 이르면, 더 말할 것도 없이, 그야말로 새로운 시대다.

가족 이데올로기는 더는 친밀성과 자기 성취의 토대가 아니다. ‘부양의무자’ 기준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에게는 고통이고 사회적으로는 갈등의 원천이다. 건강보험 장기체납분을 납부할 책임이 미성년 자녀에게 넘어갈 지경이면...현재 많은 제도적 가족은 기껏해야 경제공동체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삶을 지탱하는 체계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기대는 것이 당장 문제다. 아동학대, 가정폭력, 배우자 성폭력의 바닥에는 한결같이 정상가족에 대한 욕망과 사회적 강요가 자리를 잡고 있다. 여성, 어린이, 노인, 그 누구라도 온전한 인격과 독립한 주체로 인정받지 못할 때 사태가 발생하고 악화한다.

보통의 돌봄과 교육과 부양은 기본. 퇴원한 정신장애인을 돕는 일도, 성인 발달장애인을 돌보는 것도, 치매 노인에 대한 ‘커뮤니티 케어’도 일차로 가족이 책임져야 ‘정상’이다. 으레 어머니와 아버지, 아들과 딸, 남편과 아내가 있고, 그들이 그 완고한 전통적 역할을 하리라 믿는 것이 바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다.

병원에 입원할 때는 보증을 해야 하고, 병실에서는 가족이 수발할 일이 기다린다. 수술을 받으려면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다. ‘보호자’를 적으라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혼자, 아니면 친구와 더불어 퇴원하는 것은 참으로 예외적이서, 아마 많은 사람이 ‘비정상’이라 여길 것이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힘이 있으니, 국가가 가장 앞에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데 유리해서다. 가족 대신 정신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을 지원하는 일 전부를 떠맡아야 하면? 가난한 노인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면?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로 지탱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푸코 식으로 말하면, 과거와 같은 통치방식으로는 더는 ‘사회를 보호’하고 ‘안전’을 유지하기 어렵다. 점점 더 위험해질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폭력성과 억압이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개인으로 보면, 작게는 부담, 불화, 불안의 원인이고 심하면 아프고 병들게 한다. 사회적으로는 혐오와 차별의 원인이 되어, 결국 폭력을 부른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나란히 있는 5월 이 주, 역설적으로 그 바탕이 되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떠올리고 해체를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다른 이유가 아니라 사람들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인 한, 관계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방향은 이미 나와 있다. 독립된 인격체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친밀성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 국가와 제도가 이를 뒷받침하고 증진하는 것이 지금 과제다.

예를 들어, 주거를 비롯해 지역사회에서 정신장애인에 대한 지원체계를 갖추는 것도 한 가지 방법에 들어간다. 모든 영역 특히 경제에서 젠더가 평등한 것, 기초연금이나 아동수당을 늘리는 것, 치매 환자들 사회적으로 돌보는 것, 모두 도움이 된다. 아, 주거비를 낮추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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