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연구소 서리풀 논평] 30년 역사의 ‘전국민 건강보험’, 앞으로는?

[라포르시안] “7월 1일부터 도시지역 자영인들에게도 의료보험이 실시됨으로써 전국민 의료보험시대를 맞게 됐다. 또 이 때를 맞추어 지난해부터 농어촌지역 의료보험에만 실시돼 오던 병의원 이용체계(의료전달체계)가 전국민에게 적용돼 의료기관 이용에도 큰 변화를 맞게 됐다.”

한겨레신문의 1989년 7월 1일 기사이다. 꼭 30년 전 바로 오늘. 그보다 며칠 전인 6월 28일 조선일보도 ‘전국민 의보시대’가 시작된다고 알렸다. 굵은 제목은 “114개 조합, 1,100만명 새로 혜택”이었다.

막상 7월 1일 당일 모든 신문 1면은 임수경 ‘방북 사건’으로 도배가 되었다. 의료보험은 1977년 시작했으니, 도시 자영자로 넓힌 것은 큰 뉴스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그래도 1천만이 넘는 사람이 새로 제도 편입되었는데!). 이렇게 ‘전국민’ 의료보험은 큰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출범했다.

2000년부터 이름이 건강보험으로 바뀌었으나, 전국민 의료보험을 시작한 지 30년 한 세대를 겪은 것은 변함이 없다. 이런저런 행사나 기념을 할 만도 하건만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30년 세월이 아무런 가치가 없어서인가, 아니면 그 기간이 얼마든 앞날을 장담할 수 없어서인가? 방북 사건처럼 다른 이슈보다 관심이 적어서 그런가.

지금이라도 그냥 지나갈 수 없다. 제도를 관장하는 정부는 그렇다 치고, 실제 주인이자 고객인 시민(가입자, 국민, 주민, 인민, 사람, 무엇이라 말해도 마찬가지다)에게 30주년은 제도의 의미를 성찰하고 새로운 관계를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이다. 누구나 느끼는 그 중대한 도전들을 생각하면 기회라기보다는 차라리 의무가 아닌가 싶다.

사람마다 평가는 다르겠으나 전국민 건강보험의 의미 한 가지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으로 믿는다. 건강, 보건, 의료 모두가 건강보험으로 편입되었다는 것, 우리는 차라리 ‘건강보험화(化)’로 부르고 싶다.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 고통과 질병을 해결하는 것, 그 고통과 부담에 대한 불안과 안심, 이 모든 것은 이제 건강보험과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삶의 양식이 되어 뿌리를 내렸다고 해도 좋다.

어디 일반 시민만 그런가, 모든 병원과 의료기관, 여기에 종사하는 수많은 직업인, 약과 의료기를 만들고 유통하는 산업, 보건과 복지 정책을 다루어야 하는 공무원들에게 건강보험은 이젠 타고난 유전자에 가깝다. 몸에 익어 자연스러운 것, 보통은 잘 깨닫지 못하는 것, 때로 이상해도 도저히 떠날 수 없는 것. ‘체화’이기도 하고 ‘각인’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는 권력이다. 대표적인 것이 경제적 권력으로, 그 힘은 돈의 크기에서 나온다. 2018년 건강보험 진료비는 약 77조 원(본인부담 포함)으로 국내총생산(GDP)의 약 4%에 이른다. 보건의료비 지출 대부분이 건강보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고려하면, 건강보험의 경제 권력 지분은 사실상 그 두 배쯤 될 것이다(2017년 GDP 대비 경상의료비 비중이 7.6%이다).

왜 권력인지 한 가지 예. 건강보험은 정부가 그토록 목을 매고 야당이 거듭 시비하는 경제성장률에 영향을 미친다. 건강보험 수가를 많이 올리면 건강보험 재정은 나빠지지만, 경제성장에는 이바지한다. (순전히 계산상으로는) 건강보험 재정이 10% 늘어나면 경제성장률이 0.4% 포인트 증가하는데, 이런 것이 권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체화하고 유전자가 된 데다 권력은 크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몸통과 꼬리가 뒤바뀌는 것이다. 수단이 목적이 되고 종이 주인 노릇을 하니 특히 뭔가를 고치기는 매우 어렵다. 문재인 케어가 왜 이렇게 시비가 많겠는가, 오로지 건강보험만 바라보는 관계자와 이해당사자가 경쟁하고 각축하기 때문이다.

더 어렵고 힘든 것은 ‘낯설게 하기’. 몸에 익고 마음의 버릇이 되었으니 분리는 쉽지 않다. 아예 근본부터 다시 생각할 것이 있어도 좀처럼 새로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그러니 무엇이 문제인지도 알아차리기 힘들다. 제도가 안정될수록 이에 적응한 사람들이 스스로 낯설게 보기는 더 어렵다.

1989년 7월 1일자 한겨레 전국민의료보험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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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28일자 조선일보 전국민의료보험 관련 기사
1989년 6월 28일자 조선일보 전국민의료보험 관련 기사

오늘, 무언가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지난날이 아니라 앞으로 올 날을 말하기 위함이다. 낯선 시각으로 곧 닥칠 건강보험의 30년을 생각하면 어떨까? 무수한 논점이 있겠으나, 여기서는 딱 두 가지만 말하려고 한다. 하나는 인구와 경제 등 여건 변화, 그리고 다른 하나는 건강보험과 국가 책임. 결론은 근본적 구조 개혁이 급하다는 주장이다.

첫째 논점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 급속한 고령화와 경제성장의 정체가 건강보험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것. 쓸 곳은 빠르게 늘어나는데 건강보험 재정은 정체하면 재정 위기가 금방이다. 먼저 겪은 다른 나라도 사정이 비슷하다.

낯설게 하지 않는 한, 금방 나올 말이 익숙하다. 지출 억제, 의료 이용 적정화, 체계 효율화, 재정기반 확충 등등.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는 답들이다. 효과도 그렇지만 실행 가능성은 더 문제다. 환자, 의료직과 병원, 관료의 체질까지 바꾸어야 하는 일이니 쉬울 수가 없다.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산업’도 타격을 받을 것이다.

곧 닥칠 일에 너무나 한가하고 무심한 것이 진짜 위기가 아닌가 싶다. 뻔히 알면서도 책임은 다른 곳으로, 미래로, 쉽게 넘어간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하노라고 했다”라는 하루살이 핑계만 난무하니 공동체에 책임을 지는 그 어떤 주인도 찾을 길이 없다.

둘째 논점은 첫째와 연관이 있다. 건강보험도 어디까지나 보험, 중요한 특성 한 가지는 결국 최종 책임을 가입자에게 묻는 것이다. 재정이 모자라면 보험료를 더 내거나 덜 써야 하는 것이 보험의 논리가 아닌가. 건강보험의 무슨 문제를 말하든, 재정이든 이용이든 책임은 가입자로 돌아간다.

국가는 뒷전이다(정부가 아니라 ‘국가’!). 법에 규정된 국고를 제대로 부담하지 않은 것은 부차적 문제일 뿐, 핵심은 국가가 최종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건강보험 재정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라. ‘전장(戰場)’은 건강보험공단, 건정심, 재정위원회 등을 거쳐 가입자(국민)로 넘어가고, 책임은 민영화와 아웃소싱을 겨쳐 개인화에 이른다. 병원은 더 가면서 보험료 인상은 반대하는, 도덕적 해이에 빠진 가입자가 문제이다. 한 마디로 사회구성원의 건강과 의료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권과 책임의 외주화’.

이 길로 계속 가면 국가 책임은 최소로 줄어든다. 첫 번째 논점과 같은 조건에서 정부는 의료비 지출 억제 한 가지에만 관심이 있을 터. 모든 의료비가 아니라는 것이 함정이다. 건강보험 진료비만 늘어나지 않으면 정부 제도로서의 건강보험은 안전하다(!). 본인부담이든 민간보험이든 어느 것도 괜찮다. “국민들이 반대해서 그렇지 우리는 하노라고 했다”라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건강보험은 이런 도전에 견딜 수 있을까? 이제 제도와 체계는 어떻게 될 것이며, 병원과 의료직, 제약회사와 바이오산업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다른 무엇보다, 곧 닥칠 새로운 조건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건강과 의료와 돌봄, 그들의 의료 경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는 오늘 자세하게 논의할 여유가 없으나, 다 그만두고라도 구조 개혁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사실 지금 시작해도 이미 늦다. 30주년, 사람이 정한 것이기는 하나 새로운 세대를 명분으로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한다.

‘제2세대 건강보장’은 어떤가? 몇 가지 누더기 제도와 정책으로는 어림도 없으니 문제진단과 처방에 이르기까지 ‘발본(拔本)’의 접근이 필요하다. 다만, 누가 할 수 있는지, 무엇에서 시작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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