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학회 "난치성 뇌전증 치료 후진국...뇌자도 등 장비 운용 위해 정부지원 절실"

[라포르시안] '뇌전증'(epilepsy)' 환자 중 상당수는 적절한 약물치료로 증상을 조절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항경련제로 치료가 되지 않는 약물난치성 뇌전증 환자도 있다. 이런 뇌전증 환자는 수술을 통해 대부분 증상을 조절할 수 있다.

문제는 국내에 뇌전증 환자 수술에 필요한 검사장비와 수술장비가 단 한대도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해외로 나가서 수술 치료를 받고 있다.

대한뇌전증학회는 8일 국립중앙의료원 공공보건의료연구소의 의뢰를 받아 수행한 뇌전증 수술에 필요한 3가지 진단·수술 장비에 대한 연구조사 연구용역의 중간보고서를 공개했다.

학회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자료를 근거로 조사한 결과 국내 뇌전증 환자의 수는 약 36만명으로 추정되며, 이 중 약 10만명이 약물로 완전히 증상이 조절되지 않는 약물난치성 뇌전증 환자이다. <관련 기사: 뇌전증 진료환자 감소?…“편견·낙인효과로 실제 유병률 더 높다”>

경련증상이 자주 발생해 일상생활이 힘든 중증 약물난치성 뇌전증으로 수술이 시급한 환자 수는 3만7,225명으로 집계됐다. 이들 중 여러 가지 검사 후 수술 대상이 되는 뇌전증 수술 대기 환자는 2만2,335명에 달했다.

국내에서 실시하는 뇌전증 수술은 1년에 300건에도 못 미치는 반면 수술이 필요한 뇌전증 환자는 매년 1,000명씩 증가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국내에서 1년에 1,500~2,000건 이상 뇌전증 수술이 이뤄져야 수술 대기 기간이 줄어들 수 있다.

국내에서 뇌전증 수술건수가 적은 이유는 수술에 꼭 필요한 장비가 없기 때문이라고 뇌전증학회는 분석했다.

뇌전증이 발생하는 뇌부위를 진단하는데 가장 중요한 검사장비인 '뇌자도'
뇌전증이 발생하는 뇌부위를 진단하는데 가장 중요한 검사장비인 '뇌자도'

학회는 국내에서 뇌전증 수술에 필요한 진단·수술 장비에 대한 연구조사를 통해 ▲뇌자도 ▲삼차원뇌파수술 로봇시스템 ▲레이저 열치료 수술장비 등 3가지를 꼽았다.

뇌자도는 뇌신경세포에서 발생하는 자기(磁氣)를 측정하는 진단장비로, 뇌전증이 발생하는 뇌부위를 진단하는데 중요한 검사장비이다.

현재 전 세계 각국에 총 179대의 뇌자도가 설치·운영되고 있으며, 일본과 미국에는 각각 40대 이상의 뇌자도가 설치돼 수술에 활용된다. 한국에는 단 한 대도 없어 중증 난치성 뇌전증 환자들이 약 500만원의 비용을 써가며 일본내 병원에 가서 뇌자도 검사를 받고 있다.

국내에서 뇌자도 검사가 필요한 뇌전증 환자 수는 1년에 약 2,500명으로, 이를 감안하면 3~4대(대당 가격 30억원)의 뇌자도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뇌전증 수술에 꼭 필요한 수술장비가 삼차원뇌파(SEEG)수술 로봇시스템(대당 가격 10억원)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뇌전증 수술의 70% 이상이 SEEG수술로 시행되고 있지만 한국에는 한 대도 없다.

학회는 "로봇시스템이 없이 맨손으로 수술을 하다 보니까 수술시간이 2배 이상 걸리고 정확도가 떨어져서 수술 중에 뇌출혈이 발생하거나 전극이 다른 곳으로 들어가고, 수술 후 감염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레이저 열치료 수술장비(대당 가격 5억원)는 두개골을 열지 않고 조그만 구멍을 뚫어 내시경적으로 뇌전증 병소를 제거하는 데 필요한 장비이다. 이 장비를 사용하면 뇌의 깊은 곳에도 접근이 가능하며 병변이 여러 개 있을 때에도 쉽게 제거할 수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약물난치성 뇌전증 환자들에서 레이저 열치료 수술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으며, 뇌전증 수술의 약 20~30%가 레이저 열치료 수술로 이뤄진다. 국내에는 이 장비가 한 대도 없다.

뇌전증학회는 "국내에서 약물난치성 뇌전증 환자 4,000명 이상이 매년 수술전 검사를 받지만 실제로 뇌전증수술을 받는 경우는 300건도 안된다. 한국의 난치성 뇌전증 치료는 확실한 후진국이다"며 "50억원의 정부지원만 있으면 중증 뇌전증 환자들이 일본, 미국에 가지 않아도 수술을 받을 수 있다. 뇌전증 환자 수는 치매 환자의 약 절반 정도로, 치매 지원의 100분의 1이라도 정부 지원이 이뤄지길 간절히 바란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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