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사회정책 분야서 선택적 편견 강화시키는 ‘하지 않는 연구’
"주류 사회에서 배제된 언던 사이언스 만들어 내는 구조 허물어야"

[라포르시안] “언던 사이언스, 즉 ‘수행되지 않은 과학’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과학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왜 어떤 것들은 강조되고 어떤 것들은 배제되는지, 왜 어떤 것은 과학적으로 옳다고 ‘판단’되고 어떤 것은 틀렸다고 ‘간주’되는지를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비판적으로 추적하고 재검토한다는 뜻이다.” <책 '언던 사이언스 무엇이 왜 과학의 무대에서 배제되는가(현재환 지음, 2015년, 뜨인돌 출판사)' 중에서>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는 미국의 과학운동가 데이비드 헤스가 ‘정부, 산업, 사회운동의 제도적 매트릭스 속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된 채 생산되지 않은 지식들’을 가리키기 위해 만든 개념이다.

<언던 사이언스>에서 저자는 '하지 않는 연구' 관점에서 본다는 것의 의미를 과학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왜 어떤 것들은 강조되고 어떤 것들은 배제되는지, 왜 어떤 것은 과학적으로 옳다고 ‘판단’되고 어떤 것은 틀렸다고 ‘간주’되는지를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비판적으로 추적하고 재검토한다는 뜻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보건의료 분야에서도 '하지 않는 연구' 관점에서 왜 어떤 과학기술지식은 생산되지 않는가에 대한 문제인식이 예전부터 제기돼 왔다.

신영전 교수.
신영전 교수.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신영전 교수는 최근 발간된 <보건사회연구(제39권 4호)>에 게재한 '보건·복지·사회정책분야 ‘하지 않는 연구’ 또는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를 넘어서'라는 제목의 논설을 통해 ‘하지 않는 연구’가 사회과학영역에서 초래하는 문제점을 짚었다. <'보건사회연구' 원문 바로 가기>

신영전 교수는 이 논설에서 "하지 않는 연구가 초래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비뚤어진 선택 편견(selection bias)’을 야기한다는 것"이라며 "비뚤림은 연구자, 연구 주제뿐만 아니라 기반 이론의 선택, 연구방법론에도 영향을 미친다. 비판적 이론의 선택은 논문의 ‘게재불가’ 이유로 작용하기도 하고, 영세 소규모 연구집단이나 시민단체들은 고가의 첨단 장비를 이용한 분석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것 또한 선택 편견을 강화시킨다"고 해석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선택 편견이 특정 집단에 대한 이익 문제를 넘어 보다 객관적인 참 값에 접근하지 못하는 ‘체계적인 에러(systematic error)’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지 않는 연구가 주로 사회적인 취약층과 같은 집단에 집중되고, 이는 이들을 위한 효과적인 개입 근거를 갖지 못하게 만들어 사회 구조적인 편견과 차별을 고착화한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관련 기사: 세계 여성의 날, 젠더 관점 빠진 한국의 ‘여성 건강지표와 건강정책’>

신 교수는 "소수자와 취약계층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어 그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고, 이들을 위한 효과적인 개입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며 "이는 수 많은 개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사업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개선을 위한 개입 시도 자체가 없었고 설령 있었다하더라도 해당 사업의 효과를 확인 하는 연구가 수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의 빈약은 '효과적인 소수자 취약계층 사업이 없다'는 이유가 되어 이들을 위한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관련 기사: 건강보험 혜택, 고령 남성이 가장 크고 20~40대 여성 가장 작아>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현대의학에서 여성 질환인 유방암에 대한 연구가 오랜 기간동안 소홀하게 다뤄졌다는 점을 꼽았다. 그 결과 의학연구와 지식체계에서 '젠더 불평등'이 고착화됐다. <관련 기사: 젠더혁신'이 보건의료 연구를 더 발전시킨다!>

신 교수에 따르면 2000년 전후 미국의 여성 운동가들은 중년 남성을 ‘보편적 인간’으로 상정한 현대의학과 과학연구에서 여성 질환인 유방암이 오랫동안 경시돼 왔다고 비판하면서 다양한 운동을 전개했다.

그 중에는 2002년 여성건강주도연구도 있었는데, 이 연구를 통해 호르몬 요법이 심혈관 질환의 위험을 낮춘다는 기존의 연구결과에 결정적인 반론을 제기함으로써 호르몬 치료 시도를 크게 낮출 수 있었다.

여성의 심장질환 연구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유럽 여성에서 허혈성 심장 질환이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허혈성 심장질환은 남성의 질환으로 인식돼 남성의 병태생리학적 특징과 예후를 기초로 임상에 적용하는 기준이 마련됐다. 심장병 관련 대부분의 임상연구도 남성을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연합 회원국의 젠더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허혈성 심장질환의 진단과 치료에서 간과됐던 성과 젠더 관점을 고려한 젠더 혁신 방안을 제안했다.

표 출처: 보건・복지・사회정책 분야서 ‘언던 사이언스’를 극복하려면<신영전> - 중에서
표 출처: 보건・복지・사회정책 분야서 ‘언던 사이언스’를 극복하려면<신영전> - 중에서

신 교수는 자신이 편집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보건사회연구>지 게재된 연구성과물 분석을 통해 '하지 않는 연구'의 문제를 짚어봤다.

신 교수가 보건사회연구지에 게재된 최근 1개년도 논문을 분석한 결과 전체 게재 논문 중 보건분야가 50.7%를 넘었고, 복지(17.8%), 사회(13.7%), 보건복지(9.6%), 노동(8.2%) 순이었다.

연구대상은 일반 성인이 대다수(54.8%)였으나 상대적으로 노인의 비중(26.0%)이 높았다. 핵심주제로는 건강행태, 정신건강, 주거환경이 각각 13.7%로 제일 많았고, 돌봄, 노동조직문화 9.6%, 헬스커뮤니케이션, 성폭력 비행 학대 관련 주제가 5.5% 순이었다. 분석자료는 46.6%가 정부생산 대규모 자료를 이용하고 있었고, 74%가 계량연구였다.

반면 사회정책과 연구의 근간이 되는 이론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없었고, 정부 생산 대규모 자료를 이용한 연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는데, 이는 ‘해야 할 연구’나 ‘하고 싶은 연구’ 보다는 해당 데이터로 ‘분석이 가능한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신 교수는 "대부분의 논문이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하거나 국내적 이슈에 국한 되고, 국제정치, 경제, 사회 이슈를 다룬 연구는 적었고, 특정 지역 주민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원전, 미세먼지 관련 정책 연구, 생활조건이 열악한 미등록 이주노동자, 만성 정신장애인, 노숙자 등과 같이 상대적으로 정책에서 소외되고 있는 대상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시민적 평가 논문 등은 없었다"며 "방법론적으로는 개입 연구, 다방법론(multi-methods)에 입각한 연구, 시민이나 환자 참여 연구(participatory research) 등은 제한적인 시도만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나마 최근 들어 국내에서도 시민 노동단체들이 재원을 마련해 정부나 기업이 진행하지 않는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고, 시민들이 돈을 모아 기존 출판계나 시장에서 선호하지 않은 책을 출간하는 활동이 이뤄지면서 '하지 않는 연구'에 의한 선택 편견이 조금씩 해소된다고 평가했다. <관련 기사: 건강형평성학회, ‘젠더 폭력’ 주제 연구활동 지원사업 공모>

신 교수는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활동만으로는 막대한 예산과 인력 그리고 공권력의 지원 하에 진행되는 연구들을 넘어서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며 "궁극적으로는 ‘하지 않는 연구’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허무는 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논설의 말미에 '철학은 언어를 무기로 인류의 지성에 걸린 주문(呪文)과 싸우는 전투다'라는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하며 연구자들이 학문의 본질적인 목표를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그는 "학문은 기본적으로 위험하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이야기 하면 '위험하지 않은 학문은 학문이 아니다'"며 "왜냐하면 학문의 기본정신은 ‘비판’이며, 도그마를 깨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학자는 ‘신화 파괴자(myth-buster)’"라고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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