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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건강 연속기고③] 일터에서 입은 마음의 상처...그게 산재였던 거다

기사승인 2020.06.10  08:4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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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한소(노동건강연대 회원, 사회학 연구자)

[라포르시안] 1988년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던 15살 노동자 문송면이 수은중독으로 숨진 산재사망 사건을 돌이켜볼 때, 진료실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던진 '무슨 일을 하세요?'라는 질문은 노동환경 개선의 시작을 여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병원을 찾은 노동자에게 주로 하는 업무와 사용하는 물질을 의료인이 묻는다면 보다 적정한 진료를 할 수 있고, 다친 이후 일터로 돌아갈 수 있는 적극적인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진료실에서 환자의 직업력을 묻는 의료전문가의 질문은 보다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한 정책 개선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현장의 의료전문가가 적합한 치료와 재활 및 예방을 위해 환자의 직업을 묻고, 직업이 건강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함께 고민하자는 의미에서 '노동건강연대'와 함께 격주로 연속기고 시리즈를 싣는다. <편집자주>

우연한 기회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노동자의 업무상 질병 판정서를 보게 되거나 판결문을 검색해 볼 때면 의료전문가도 법률전문가도 아닌 나에게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지는 문구들이 있다. 첫째는 재해자가 주장하는 내용이 “우울증 등 질병에 이를 만큼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스트레스 요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문구를 볼 때마다 '사회 평균인'의 통상적 스트레스 수준이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이것이 업무상 질병인지를 심사했던 근로복지공단 질병판정위원들도 법원에서 판결을 내린 판사도 내가 속한 사회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도 일터에서 하루하루 바쁘게 처리해내야 할 많은 일들이 있겠지. 빠져나갈 틈 없는 촘촘한 평가를 통해 성과 압박을 받고 어디에 속하는지 등급이 매겨지겠지. 야근을 밥 먹듯 할테고 밥 먹을 시간이 없을 때는 김밥으로 때우려나. 그가 속한 조직에도 명시적인 규칙과 암묵적인 규칙이 따로 있겠지. 일로 인해 조직 내외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할테고 그 과정에서 소위 말하는 쪼인트가 까이는 경험을 하려나. 재해자가 주장하는 업무상의 스트레스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스트레스라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릴 때 그는 자신이 교육받고 일해 왔던 그곳에서 ‘직장문화’라 부르는 것을 떠올렸을까.

또 다른 수수께끼 문구는 ‘개인적인 요인이 크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도” 산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언론을 통해 알게 됐다는 A는 장시간 노동과 상사의 괴롭힘으로 인해 악화된 정신건강에 대해 산재를 신청했다. 업무와 질병의 인과관계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현 산재보험의 체계상 그는 자신이 다녔던 병원의 상담기록을 구해 일과 관련된 부분을 형광펜으로 표시해가며 산재 신청을 준비했는데 자신이 말했던 내용이 상담기록에 적혀 있지 않아 자료를 준비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A는 그 상담기록이 일조했을 산재 결과 통지서를 보여주었다. 

“재해자는 업무수행 과정에서 상사의 잦은 타박 및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등을 주장하고 있으나 스트레스의 대상이 가족에서 상사로 투사되는 과정으로 판단됨”이란 말이 쓰인 불승인 통지서를 보여주며 A는 말했다. “제가 부모님과 사이가 안 좋은 것과 상사로부터 불합리한 지시를 당해 건강이 안 좋아진 게 무슨 상관이죠?” 그래서일까. 업무상 정신질환을 인정하는 문서들에서는 ‘정신과 진료 이력도 없고, 개인적인 생활문제, 가족문제, 금전적 채무 등 업무 외적인 이유도 없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업무 관련성이 있다고 판단된다’는 문구들이 등장한다. 대출도 없고, 가족과 불화도 없고, 애인 및 친구와도 사이가 좋으며, 정신과를 한 번도 다니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 ‘완전무결함’에 대한 강박이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성폭력 생존자, 파업에 참여하는 노동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장애인, 성소수자...기존의 '사회 평균인'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낙인 찍고 재단하는 시선이 아니던가.

한편 B는 “회사 내 괴롭힘으로 보고하고 있는 사건 이후 우울감, 불면, 두근거림, 불안함으로 방문 후”로 기재되어 있는 주치의의 진단서가 회사 관계자들을 ‘불편하게’ 한 사연을 들려주었다. 회사에 제출한 그 진단서를 본 관계자는 ‘회사 내 괴롭힘이라는 말을 빼라, 그렇지 않으면 그 병원을 찾아가겠다’ 운운하며 분노했단다. 직장에서의 비위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이후 조직적·지속적으로 왕따를 당하던 B는 잠을 못 자고, 식은 땀이 나며, 두통과 복통을 달고 살면서 여러 진료과, 여러 검사를 전전한 끝에 정신과를 찾았다. 그때 받은 우울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진단명을 보며 그는 한편으로 다행이자 한편으로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자신이 꾀병을 부리거나 ‘프로불편러’가 아니라 아프다는 것을 인정받은 점에서는 다행이었지만 지금의 일터가 아니었다면 이곳에 입사하기 전 ‘강철멘탈’로 불리던 내가 이렇게 아프게 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B는 주치의의 지지와 함께 지금도 치료와 회사와의 지난한 싸움을 동시에 이어가고 있다. 이렇듯 정신건강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서 전반적인 근무환경을 고려하는 일은 비단 한 개인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사회적 약자 편에 서는 전문가들의 자문이 다 그러한 역할을 하긴 하지만 때로 정신과 의사의 진단은 의학적 지식의 확인 이상으로 힘을 가질 때가 있다. 사측으로부터 탄압받던 노조원들에 대한 ‘적응장애’ 진단은 노조에게 가해지는 인권유린을 고발하는 언어가 되어 2003년 한국 최초로 집단적으로 정신질환 산재를 신청하는 사건을 만들었다. 2009년부터 시작된 쌍용차 노동자들에 대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 또한 정리해고가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초래하는 참상을 증언하며 사회적 연대를 모으는 데 기여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정신적 고통을 질병의 상태로 의료화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고통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은 중요하다. 불안정한 일자리, 조직적·지속적으로 가해지는 괴롭힘, 옥죄는 성과 압박, 진상 고객을 상대하는 일 등 우리의 일터에 계속 존재하고 있으면서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앗아가지만 ‘업무상 질병’으로 불리지 않았던 위험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공식적인 통계를 통해서 일과 정신건강 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2018년 업무상 사고와 질병으로 산재를 당한 노동자는 1만2,305명이고 여기에 정신질환 산재(자살 포함)는 단 201건, 0.2%에 불과하다. 2017년 리투아니아가 OECD에 가입하면서 2위가 된 것을 제외하고 2005년부터 OECD 회원국 자살률 부동의 1위(하루 평균 37.5명이 자살)를 지켜온 나라에서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저 '201'이라는 숫자는 산재를 신청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업무와 악화된 정신건강 사이의 인과관계를 주장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의 수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2015~2019년 지난 5년간 가장 산재 신청이 많았던 직종이 관리자(20%)였다는 점도 이를 말해준다. 잊을 만하면 언론에 등장해서 사람들의 공분을 사지만 그리고 곧바로 사그라드는 경비노동자, 백화점 판매원, 마트 캐셔, 승무원, 콜센터 상담원들의 사례가 저 201건에 얼마나 들어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한편 2013~2017년 5년간 경찰청에서 집계한 자살 사례의 원인 1위는 정신적·정신과적 문제(31.7%), 2위 경제생활문제(25%), 3위 육체적 질병 문제(20.6%) 순으로 이어지며 “직장 또는 업무상의 문제”는 3.9%로 나온다. 그렇다면 실제 응급실을 방문한 자살시도자에 대해 정신과 전문의가 판단한 자살기도원인(단수응답)은 어떨까. 

보건복지부 <자살실태조사(2018)>에 따르면 정신과적 증상(42.8%), 대인관계 문제(25.4%), 금전손실(6.1%), 외로움·고독(2%), 직장관련 문제(1.9%), 만성적 빈곤(1.0%) 순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정신과적 증상”으로는 우울을 80%로 꼽았다. 이처럼 ‘정신과적 문제’와 ‘직장 관련 문제’는 따로 떼어져 존재하는 것일까. 평생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하고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 일터인데도. 직장 문제와 경제생활문제의 관계는? 육체적 질병은? 대인관계는? 금전손실과 만성적 빈곤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자살기도자가 보인 정신과적 증상의 80%인 우울은 역시 무엇의 결과일까. 자살을 비롯 '정신과적 증상'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발현된다는 점을 감안해도 '직장 관련 문제'와 '정신과적 증상' 사이에는 숨겨진 고리가 많아 보인다.

이 연결 고리를 찾는 것은 비단 산재보상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언론에 보도되는 극단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앓고 있는, 위험 음주를 하고 있는, 아니면 무기력을 호소하거나 그저 수면제 처방을 위해 방문한 환자에게 일과 관련된 질문을 함으로써 그 실마리를 조금씩 찾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경력이 쌓일수록 숙련도가 느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만 쌓이는 것 같아요. 이렇게 쌓이다 보면 상관없어 보이는 무언가로 빵 터질 수 있겠죠. 제 동료들을 보면 그렇게 되기 전에 일을 그만두더라고요.” 

이 연결고리를 찾는 일은 C의 말처럼 스트레스가 빵 터져 버리기 전에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해서 드러난 고리들은 “사회평균인”들의 ‘통상 스트레스 역치’를 낮추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노동건강연대는 모든 노동자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옹호하고 이를 위한 활동을 하는 사회운동단체이다. 계약직, 파견, 외주하청, 특수고용직 노동자 등 비정규직 노동자, 소규모 영세사업장 노동자 등 노동조합을 조직하기조차 힘든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활동을 펴고 있다. 기업이나 정부의 후원을 받지 않고, 단체 활동을 지지하는 회원들의 회비와 후원으로만 운영되는 비영리 민간단체이다. 노동건강연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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