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경(고대안암병원 흉부외과 교수)

선경 고대안암병원 흉부외과 교수
선경 고대안암병원 흉부외과 교수

[라포르시안] 대통령 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전문위원, 한국보건산업진흥원 R&D 진흥본부장, 오송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이사장….

보건의료분야 공무원 혹은 그 언저리 행정 관료의 이력이 아니다. 내년 2월 정년을 앞둔 선경 고대안암병원 흉부외과 교수가 걸어온 발자취의 일부다. 임상의사이면서 보건의료 정책과 행정을 두루 경험한 인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희소성이 있다.

선 교수는 융·복합 혁신의료기기가 그렇듯 의학과 기계·물리·재료·제어·전자 등 기술과의 ‘융합’은 물론 의사와 공학자·생명과학자 간 ‘소통’을 강조해왔다.

그가 융합과 소통을 강조한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2003년 고대의료원 내 연구소로 시작한 ‘한국인공장기센터’ 소장을 맡으면서 학제 간 다른 입장과 의사소통 방식을 허물고 공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했기 때문.

선경 교수는 당시 ‘인공심장’ 상용화에 나서면서 국산 의료기기와 의료기기산업 전반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1993년도에 미국으로 건너가 3년간 심장이식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수술은 잘 배워왔는데 정작 심장 공여자·수혜자 등 관련 제도가 미비해 심장이식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현실을 깨달았다”며 "제도와 시스템이 뒷받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학적인 기술과 지식만으로는 심장이식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인공심장을 직접 개발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했다.

하지만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흉부외과 의사로서 외래 진료와 수술·연구만으로도 빠듯한데 인공장기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인공심장을 개발하는 건 ‘무중유생’(無中有生)의 과정이었다.

고대의료원 임상경험과 서울대병원 의공학과 공학기술이 의기투합해 세계 최초의 양심실 보조장치 ‘애니하트’(AnyHeart)가 탄생했다. 애니하트는 미니피그·송아지에 이식, 6개월 장기생존을 입증해 국제학술지 논문 표지 타이틀을 장식하는 등 국내외 의료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4차 산업혁명 관점에서 본다면 융·복합 혁신의료기술을 접목한 혁신의료기기였던 애니하트는 과연 상용화됐을까.

선 교수는 “애니하트는 기계적으로 최종 완성 단계에 있었다. 동물실험을 통한 6개월 장기생존도 여러 케이스를 확인했고 제품화·상용화를 위한 임상시험만 남아있었다”며 “문제는 임상을 우리가 아닌 의료기기업체가 해야 하는데 선뜻 나서는 곳이 없었다”고 전했다.

그는 “임상을 진행해 인공심장을 제품화 할 수 있는 의료기기업체와 대기업을 찾아다녔지만 아무도 러브콜에 응답하지 않았다”며 “인공심장과 같은 의료기기 임상시험은 의사가 연구책임자일 뿐 실제 임상을 신청하는 주체는 업체이기 때문에 결국 애니하트 상용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역사에 가정법은 없지만, 만약 애니하트가 상용화됐다면 현재 미국 독일에서 수입하는 고가 인공심장을 대체하는 것은 물론 이식형 의료기기 원천기술도 한국이 확보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선경 교수는 애니하트를 통해 의료기기 상용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뼈저리게 경험했다.

이를 계기로 업체가 의료기기를 개발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가치를 창출하면서 이익이 발생하기까지 거쳐야 할 세 가지 장애물, 즉 ‘악마의 강’(River of Devil)에서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을 지나 ‘다윈의 바다’(Sea of Darwin)를 건너야하는 험난한 과정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특히 의료기기 연구개발부터 상용화 과정에서의 생태계를 이해하고, 의료기기산업 가치사슬(Value Chain·밸류체인)을 통한 부가가치 극대화 방안을 모색하게 됐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R&D 진흥본부장·오송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이사장은 이러한 방안을 실제 의료기기산업 현장에 적용해 실행하고자 수행한 이력이었다.

선 교수는 바이오헬스산업이 미래 먹거리이자 국가 성장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업체들이 ‘죽음의 계곡’을 극복할 수 있는 전향적인 지원정책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죽음의 계곡은 업체가 초기 기술개발에 성공했더라도 사업화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 넘어야 할 어려움을 나타내는 용어. 아이디어·기술 사업화에는 성공했지만 이후 자금 부족으로 상용화에 실패한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선 교수는 “업체가 제품을 개발해도 사업화에 성공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의 계곡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문제는 정부 연구개발(R&D) 투자가 대부분 ‘기술개발과제’에 편중되고, 고부가가치 원천기술만 개발하면 사업화로 시장에서 돈을 벌 것이라는 단편적인 사고에 머물러 있다”고 꼬집었다.

“경영학에서 보면 ‘기술은 시장을 지배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물론 기술도 중요하지만 중·저부가가치 기술이라도 현장 수요가 있다면 사업화 할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효용가치 입증 없이 기대심리만 악용하는 ‘좀비기업’ 선별해야"

고부가가치 원천기술이 아니더라도 중·저부가가치 기술을 제품화·사업화 할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뭘까.

다품목·소량생산이 특징인 의료기기는 신제품이 출시되면 해당 특허를 우회·회피하는 방법으로 쉽게 모방할 수 있어 사실상 원천기술이 존재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범용기술이라도 의료현장 수요가 있다면 제품화로 시장을 선점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방안도 고려해야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의료기기업체가 죽음의 계곡을 건너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자금 부족인 만큼 원천기술 개발과제와 함께 업체의 수익 창출이 가능한 실질적인 성과위주 과제 지원도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정부가 투자해 지원하는 연구개발사업의 ‘평가지표’ 또한 재정비해야한다는 점도 짚었다. 정부 연구개발사업의 평가지표는 ‘논문·특허·시제품’ 세 가지로 여기에 ‘민간투자 유치’를 제4의 평가기준으로 추가하자는 주장이다.

그는 “의료기기업체들이 죽음의 계곡을 넘지 못하는 이유는 규제가 아닌 자금 문제에 있다”며 “정부 연구개발투자가 민간투자를 유도할 수 있는 ‘마중물’ 역할을 해줘야 업체가 개발한 제품을 상용화·사업화할 수 있는 자금을 확보해 의료기기산업화가 가능하다”고 해법을 제시했다.

보건복지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4개 부처가 2020년부터 2025년까지 6년간 1조2,000억 원 예산을 투입해 의료기기 R&D를 지원하는 ‘범부처전주기의료기기연구개발사업’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나타냈다.

선 교수는 앞서 해당 사업단장 공모에 응모했지만 고배를 마신 바 있다. 현재 초대 사업단장은 선 교수의 절친한 후배인 김법민 고대 바이오의공학부 교수다.

범부처의료기기사업단은 의료기기 R&D 기획 단계부터 의사를 참여시키고 사업화가 가능한 의료기기 개발 지원에 초점을 맞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선 교수는 “범부처의료기기사업이 엔지니어·의사가 PI(연구책임자)가 되고 업체가 형식적으로 따라가는 형태가 되서는 안 된다”며 “사업단이 추구하는 목표 역시 업체가 수익을 낼 수 있는 실질적인 성과 위주의 사업화·산업화에 초점을 맞춰 지원이 이뤄져야한다”고 제안했다.

그가 생각하는 실질적인 성과 위주의 사업화 방안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미래 지향적인 의료기기 원천기술은 반드시 ‘제품화’를 목표로 하기 보다는 해당 기술을 이전하거나 기업 인수합병(M&A) 및 대형 투자를 유치해 재무적인 수익성과를 낼 수 있도록 지원해야한다는 거다.

또 시장은 작지만 공공성이 크다고 판단되는 의료기기는 정부가 공공구매 등 공적 조달을 통해 일정부분 수익을 보장함으로써 업체가 자금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한다.

선 교수는 “범부처의료기기사업단의 추진 방향은 철저히 ‘상용화 사업화 산업화’를 타깃으로 삼아야한다”며 “의료기기 R&D 지원을 꼭 제품화하는 것에 국한하지 말고 기술이전, 인수합병, 투자 유치, 국가 공공조달과 같은 다양한 출구전략을 고려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만 “일각에서는 범부처의료기기사업을 기술력이 부족한 영세한 업체들이 생존할 수 있는 생태계 조성사업으로 오해하는 것 같다”며 "생태계는 ‘약육강식·적자생존’의 명확한 먹이사슬 구조다. 정부는 승자독식이 되지 않도록 건강한 먹이사슬을 만드는 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경쟁력이 없는 업체를 마치 인큐베이터로 키우듯 지원해주는 것은 비효율적인 자원 낭비에 불과할 뿐”이라고 경계했다.

특히 최근 바이오헬스산업이 부상하면서 너도나도 혁신의료기술·혁신의료기기를 표방하지만 기술력과 경쟁력이 없고 병원에서도 효용성이 없는 제품을 마치 임상시험만 하면 주식이 크게 오르거나 기술특례 등 우회상장이 가능할 것처럼 과대포장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면서 “선량한 실패는 괜찮지만 효용가치도 입증하지 못한 채 사람들의 기대심리만을 악용하는 ‘좀비기업’은 선별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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