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포르시안]  “불황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지만, 긴축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2013년 11월 국내에 출간된 <긴축은 죽음의 처방전인가>라는 책 속에 나온 말이다. '긴축은 죽음의…'는 영국의 공중보건학자인 데이비드 스터클러와 미국의 감염병학자인 스탠퍼드대 산제이 바수 교수가 공동 집필한 책이다. 두 명의 저명한 공중보건학자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기, 1991년 공산주의 붕괴 뒤의 러시아와 동구권, 1998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는 세계 금융위기 상황에서 각 국가에서 선택한 정책에 따라 그 나라 국민이 얼마나 목숨을 잃고 질병이 늘었는지를 구체적인 통계와 자료를 통해 제시했다.   이들이 전 세계 국가들의 데이터를 살펴본 결과, 재정 긴축 정책을 선택했던 국가의 국민들은 실업의 증가, 자살, HIV 감염과 각종 감염병의 확산과 같은 고통을 겪었다. 반면 경기 부양 정책을 선택했던 국가의 국민들은 불황 속에서도 사망률이 감소하고 전보다 더 건강해지는 결과를 보였다. 비슷한 상황에서 이렇게 극명한 차이를 보이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주택 지원과 실업 프로그램, 노인연금, 보건의료 서비스와 같은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지출을 늘리느냐, 혹은 축소하느냐에 있었다고 한다.

역사상 최악의 은행 위기로 흔들렸던 아이슬란드가 대불황 시기에 사망률이 높아지는 현상을 겪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 아이슬란드 정부가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더욱 확대했기 때문이다. 반면 유럽에서 긴축 정책의 시험대가 됐던 그리스는 정부 지출을 엄청난 규모로 감축한 결과, HIV(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 감염자 수가 52% 증가했고 자살률은 2배로 늘었다. 저자들은 이 모든 현상이 공중보건 프로그램 예산을 감축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했다.  지금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분명 겉으로는 긴축재정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보건복지 분야에 있어서 교묘하게 긴축 재정을 펴보 있다. 건강보험 재정 운영이 가장 대표적이다. 2014년 말을 기준으로 건강보험 재정은 약 13조원의 누적수지 흑자 상태를 기록했다. 2012년부터는 3년 연속 3조원이 넘는 기록적인 흑자를 이어온 결과다. 건강보험 재정이 흑자 기조를 유지한 이유는 거둬들이는 보험료 수입에 비해 가입자의 의료서비스 이용에 따른 급여비 지출 증가율이 둔화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국민들의 의료이용률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보건복지부의 설명이 흥미롭다. 복지부는 급여비 증가율 둔화의 원인이 건강행태의 변화, 의료기술의 발전, 환경요인 개선, 건강한 고령화 등에 따른 결과라고 설명했다. 건강검진 등의 의료이용이 늘면서 관련 질환 예방 및 조기발견 등으로 의료비 지출 증가세가 감소햇고, 의료기술 발달에 따른 수술건당 입내원일수 감소로 암 급여비 등의 증가율 둔화, 그리고 건강한 고령화와 노인장기요양보험의 확대 등으로 노인진료비 증가율과 노인 인구당 진료비 증가가 둔화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급여비 지출이 감소한 것이 국민들의 건강지표가 향상되면서 의료서비스 이용의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분석이다.   과연 그럴까.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소득이 줄면서 아파도 참고 병원을 찾는 일이 줄었다는 반박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실제로 질병관리본부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실시된 국민건강영양조사 원시자료를 분석해 펴낸 '우리나라 성인의 미충족 의료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적 부담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한 비율이 2010년 15.7%에서 2013년에는 21.7%로 늘었다. 특히 노인진료비 증가율이 둔화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노인진료비 급증이 건강보험 재정을 가장 크게 위협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노인진료비 증가율이 둔화됐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한국 노인세대가 처한 상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노인 중 상당수는 은퇴 이후에 노후소득이 거의 없어 빈곤층으로 전락한다. 최근 한국노동연구원이 펴낸 '노인의 빈곤과 연금의 소득대체율 국제비교' 보고서를 보면 2011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층의 빈곤율은 48.6%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았다. 한국 다음으로 노인 빈곤율이 높은 스위스(24.0%)와 비교해도 2배 수준에 달했다. 상당수 노인이 절대빈곤 상태에 빠져 경제적 부담으로 의료서비스 이용에 제한을 받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지난해 7월부터 65세 이상 노인에게 지급된 기초노령연금의 지출처를 보면 더욱 그렇다. 기초노령연금을 받은 경험이 있는 수급자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가장 많이 지출한 분야는 바로 보건의료비(44.2%)였다. 그만큼 의료이용 욕구나 필요성은 있었지만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13조원에 달하는 건강보험 누적흑자를 보장성 강화에 적극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냥 쌓아놓고만 있다. 긴축이나 마찬가지다. 시민사회와 의료계에서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적극적 보장성 강화 정책을 추진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듣지 않는다. 오히려 입원기간이 길면 입원료 본인부담금을 인상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게다가 의료급여 수급자를 상대로 '진료비용 알림서비스'를 제공하게다고 한다. 의료급여 수급자에게 특정 기간동안 의료이용량이 매우 많다는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의료급여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된다'는 말까지 친절하게 덧붙여서. 생각해보라. 만일 저런 내용을 담은 통지서 같은걸 받게 된다면 어떤 마음이 들지. 당장 병원을 찾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다. 의료급여 수급자에게는 의료이용을 줄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복지부는 의료급여를 마치 가난한 빈곤층에게 베푸는 수혜처럼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이거야말로 정말 문제다, 의료급여제도는 국가가 국민을 위해 해야 할 지극히 당연한 의무다. 이를 두고 혜택을 베푼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큰 착각이다. 복지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의료급여 진료비용 알림서비스가 아니라 의료사각지대에 방치된 빈곤층을 최소한 의료급여제도 안으로 끌어들이는 거다. 2007년 185만명에 달하던 의료급여 수급자 수가 2013년에는 145만명으로 줄었다. 전체 국민 중 의료급여 수급자 비율이 3%다. 같은 기간 절대빈곤층 비율은 10% 안팎으로 400~5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최소한 200~300만명의 절대빈곤층이 의료급여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의미다.

흑자가 쌓여가는 데도 건강보험의 긴축재정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의혹처럼 건강보험 재정에 대한 국고지원을 축소하기 위한 명분으로 삼으려는 게 아니라면 긴축재정이 아니라 보장성 확대에 더 많이 지출해야 한다. 치졸한 방식으로 의료급여 수급자들의 도덕이 해이를 문제 삼기 전에 국가의 기본적 의무를 다했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국가가 돌봐야 할 가난한 환자들을 건강보험에 떠넘기고, 해마다 의료급여 예산을 부족하게 편성해 의료급여비 미지급 사태가 반복되고 있다. 국민건강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의무를 소홀히 한 도덕적 해이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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