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에 개원 앞둔 '살림의료생협' 추혜인··김혜정·유여원

2012년은 UN이 선정한 ‘세계 협동조합의 해’라고 한다. 협동조합이라면 농협, 수협 같은 생산자협동조합이나 무공해비누 같은 것을 파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 떠오른다. 의료생활협동조합(의료생협)에 대해 아느냐고? 겨우 들어나 본 것 같은데, 전국에 무려 225개 이상의 의료생협이 운영 중이라 한다. 최근 보건복지부와 공정거래위원회에서는 난립하고 있는 의료생협에 대해 일제점검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의료생협이 뭔지도 잘 모르겠는데, 이런 뉴스를 접하자니 굉장히 부정적인 느낌마저 든다.

의료생협은 지역주민의 출자와 참여로 조합을 만들어 의료기관을 개설하고, 의료인과 지역주민들이 의료와 건강관련 사업을 펴나가는 공동체이다. 1994년 설립된 안성의료생협이 시초이다. 안성의료생협은 1987년부터 시작된 7년간의 농촌 주말진료활동이 의료생협의 설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인천의료생협은 1989년 설립된 인천평화의원의 산재와 직업병, 보건예방사업 등의 활동에 뿌리를 둔다. 이후 지역화폐운동을 기반으로 한 대전의료생협 등 지역운동과 결합된 의료생협들이 더 생겨났다. 이런 의료생협이 전국에 15개가 있으며, 한국의료생활협동조합연대(http://www.medcoop.or.kr/)에 가입되어 있다. 그렇다면 225개에 달한다는 의료생협 중 15곳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체 뭘까.

현행 의료법 상 의료인이 아니면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없다. 이런 규정을 피해 가기 위해, 비의료인이 영리를 취할 목적으로 협동조합의 형태를 취해 부속의료기관을 설립하고 편법적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사의료생협, 혹은 '사무장병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들 의료생협은 1999년도에 제정된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 상에 나와 있는 설립요건만 서류상으로 충족시켜 조합을 설립하고 부속의료기관을 개설하여 의사를 고용해 진료를 해왔다. 지역주민의 참여나 예방의학 사업 등의 활동이 있을 리 없다. 항생제처방률도 전국 병의원의 평균을 훨씬 상회한다고 한다.

이런 유사의료생협이 지난 2010년 3월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의 개정을 계기로 급격히 늘고 있다. 지난 2009년에 108개였던 전국 의료생협의 수가 2011년에는 225개로 두 배 이상 증가하였다. 개정된 법은 의료생협을 비영리법인으로 규정하여 의료기관 설립의 법적지위를 확고히 하고, 비조합원에 대한 진료를 50%까지 허용하여 영리를 취하기도 쉽게 하였다. 또한 사회적 기업으로 인정받아 법인세와 소득세를 대폭 감면받고, 직원의 인건비의 상당부분을 지원받는 등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이런 법을 악용해 전국에 영리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의료생협이 우후죽순처럼 늘고 있다고 한다. 현행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상 의료생협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최소 30인의 발기인과 300명의 조합원과 3천만원의 출자금이 모여야 한다.(한사람의 출자금이 20%를 넘으면 안 된다). 또 조합원의 50%가 참석해 창립총회를 열어야 한다. 300명의 조합원과 150명의 참석자를 어떻게 모으느냐고? 어렵지 않다. 이런 문제들을 ‘알아서 해결해주는’ 브로커들까지 성업 중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의료생협’을 치면 이런 일을 대행해주는 ‘컨설턴트’ 업체와 법무사 사무실 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서울 은평구에 '살림의료생협'(http://cafe.daum.net/femihealth)이 개원을 앞두고 있어 눈길을 끈다. 무늬만 의료생협인 곳들과는 달리 지난 2월 역촌동의 살림의료생협 사무실에서는 조합원의 50%에 해당되는 163명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창립총회식을 가졌다. 지난 2009년 준비모임이 시작된 이래, 3년간 착실하게 지역주민들과 활동을 벌여온 결과이다. 지난 4월에는 구산역 근처에 첫 진료기관이 들어설 자리를 확정하고, 8월 개원을 목표로 지금 막바지 준비 중이다. 현재 약 530명의 조합원과 약 9,500만 원의 출자금을 확보했다. 살림의료생협은 은평구, 고양시, 일산시 등을 지역기반으로 삼고, 여성주의를 표방한다. 발기인들이 의료생협을 구상하게 된 계기도 비혼여성의 건강문제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되었다. 초기 조합원의 상당수도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는 20~30대 비혼여성들과 활동가들이었다.

지난 24일 살림의료생협 사무실에서 가정의학과 전문의인 추혜인(무영)님과 조직활동가 김혜정(오매)님, 유여원(어라)님을 만났다.  


# 여성단체에서 만난 두 활동가, '여성주의 의료생협'을 꿈꾸다

황진미(이하 황) : 2006년 추혜인님과 유여원님이 ‘언니네트워크’(http://www.unninetwork.net/)라는 단체에서 만나 여성주의 의료생협에 대한 구상을 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다.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추혜인 (살림의료생협의원 주치의, 가정의학과 전문의)

추혜인(이하 추) : 유여원은 2001년부터 알고 지내던 학교선후배사이이다. 2004년도에 언니네 사이트로부터 ‘언니네트워크’가 독립하여 만들어졌다. 언니네트워크에서는 법의 개선을 통한 여성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여성주의문화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했다. 비혼과 대안 공동체에 대한 논의들도 활발했다. 2006년도에 나는 본과4학년이자 언니네트워크의 활동가였고, 유여원은 상근활동가로 다시 만났다. 비혼에 대한 고민은 바로 내 문제였기 때문에, 어떻게 비혼여성으로 건강하게 노후를 보낼 것인가 하는 고민을 유여원과 대화하며 여성주의 병원에 대한 구상을 나누었다. 하지만 2007년에는 인턴을 하느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인턴을 마치고 2008년 한해를 쉬면서 유여원과 6개월간 남미여행을 하면서, 막연했던 생각들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건강문제 해결을 위해선 병원이 아닌 의료생협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이 모아졌다. 한국의료생협연대를 찾아갔고, 그곳의 조언으로 나는 1차 진료에 가장 적합한 가정의학과를 택해 전공의생활을 하게 되었고, 유여원은 의료생협 실무를 익히게 되었다.

: 6개월간의 남미여행이라니 너무 낭만적이다. 체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생각나고. 의대를 다니면서 언니네트워크 활동가로 일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언제부터 여성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 남미여행은 순전히 여행베테랑이었던 유여원 덕분이다. 내가 공대로는 96학번이고, 의대로는 98학번이다. 공대에서 내가 전공한 토목공학과에는 내가 유일한 여자였다. 그것도 학부제로 바뀌면서 처음으로 여학생이 들어온 것이다. 여성이 소수자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여성주의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당시에 한참 성정치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하였다. 98년도에 예과에 입학하였지만 여성주의운동에 더 관심이 있어서 활동가로서 일을 하였었다. 그래서 2003년도에야 본과에 들어갔다. : 유여원님은 한국의료생협연대를 통해 체계적인 실무를 익혔다고 들었다.유여원 : 2008년도에 한국의료생협연대를 찾아갔더니, 노원구에 있는 ‘함께걸음의료생협’에서 일을 해보라고 하여 그곳에서 1년 정도 실무를 익혔다. 그곳은 장애우 권익문제연구소에서 출발한 의료생협이다. 2009년도에는 다시 한국의료생협연대로 와서 일하며, 의료생협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를 익힐 수 있었다. 한국의료생협연대 분들은 여성주의 의료생협을 만들고 싶다는 우리의 취지를 백분 이해해주시고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 은평 지역사회와의 상생적 만남

: 은평에 자리를 잡게 된 배경은?

: 추천을 많이 받았다. 처음에 마포도 물망에 올랐었는데, 그쪽은 성미산 마을을 운영하시는 분들이 추진 중이라 해서,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은평구는 서울시에서 재정자립도 최하위인 지자체이다. 고혈압, 당뇨 등 보건지표조사 상으로도 취약 지역이다. 충족되지 못한 부분이 많은 만큼, 할 수 있는 것도 많겠다고 생각했다. 은평은 저소득층이 많고 소득격차가 적은 편이다. 집값이 싸고, 아파트가 적으며 고만고만한 빌라나 주택이 많다. 정주율이 높고, 노인과 비혼 여성의 인구가 많으며, 아이들도 많은 편이다.

: 서울시내 중 가장 부동산이 저평가된 지역이다. 은평에 살던 집값과 전세 값으론 서울시내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으니, 정주율이 높을 수밖에. 돈 없는 활동가들도 많이 살고, 한양주택 등 지역운동의 전통도 있는 곳 않은가.  

▲김혜정 (살림의료생협 조직교육실장)

김혜정(이하 김) : 서울시내 웬만한 곳은 너무나 변화무쌍해서 지역운동을 하기 힘들다. 은평은 비교적 조용하고 변화가 적은 곳이다. 은평구에서 오랫동안 지역운동을 해 오신 최순옥(열린사회시민연합)님 등, 많은 지역 활동가분들이 환영하고 도와주신 덕분에 살림의료생협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다들 너무 멋진 분들이다.

: 2009년 준비모임 후 지자체와 협력해 지역사업을 이미 하는 것으로 안다.

: 은평 구청과 구 보건소와 협력해 대사증후군 관리사업을 하였다. 고도비만인은 대상으로 6주 코스로 만보걷기와 현미채식 프로그램을 시행하였다. 1차에 12명, 2차에 15명이 시작하여 10명씩 모두 20명의 대상자가 최종까지 남았다. 대상자들에게 1:1 맞춤으로 상담을 하여, 할 수 있는 과제를 수행시켜서, 2.5Kg 체중감량과 콜레스테롤 수치 하강 등의 결과를 얻었다. 물론 이 사업은 처음부터 연구용으로 기획한 게 아니어서, 논문으로 발표하거나 객관적 수치로 성과를 논하기는 부적절하다. 그보다는 참여자들의 만족감이 진짜 높았다. 구청과 보건소는 건강관련 사업을 하고자 한다. 다만 디테일이 좀 부족한데, 우리와 협력하여 성과를 공유하면 서로 좋은 것이다. 특히 간호사 출신의 공무원들이 우리가 기획한  사업을 재밌게 느끼고 협력하려 한다.

: 우리의 사업이 남다른 이유는 기획단계에서부터 조합원들의 참여가 있기 때문이다. 다 만들어진 프로그램에 주민들을 동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를 하나하나 주민들이 의논하고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이미 재미가 있고 만족감이 높은 것이다.  

: 오는 8월에 구산역에 개원을 앞두고 있다. 가장 신경을 쓴 대목은 무엇인가? 

: 지난 4월, 조합원들의 회의를 거쳐 구산역으로 입지를 결정하였다. 시중에 나와 있는 개원에 필요한 체크리스트를 우리식대로 변형해서 적용하여 보니, 구산역이란 답이 나오더라. 구산역은 은평구에서 걸어 다니는 인구가 가장 많은 번화한 곳이고, 조합원들도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이다. 1층에 두레 생협이 있는 건물이라 상생효과를 노렸다. : 현재 5백여 명의 조합원 중 여성주의자 등은 절반이하이다. 나머지는 지역주민이다. 진료소는 비조합원의 진료도 가능하다. 앞으로 진료를 통해 우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우리는 진료를 통해 이분들께 신뢰를 주어야 하고, 진료이외의 건강 활동과 사업에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소모임 활동도 많다. 유기농텃밭이나 건강밥상 만들기, 걷기, 산행, 춤 등의 활동을 통해, 자기 건강을 스스로 돌보는 일을 하고 이를 체험한 사람들이 건강 리더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것. 이런 선순환을 통해 밖으로 열리고 외연이 확장되어 가야한다. 이게 잘 되느냐가 성패의 관건이다.

: 개원 이후 하고 싶은 것은?

: 진료를 통해 건강이 무엇인지의 개념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 질병에 걸리더라도 건강한 경우가 있다. 암 생존자도 이웃과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몸에 질병이 없더라도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면 건강한 삶이 아니다. 진료실에서 약을 처방해주면서 “생활을 바꾸세요”라고 말하는 것에 그쳐선 안 된다. 실제로 그 사람에게 생활을 바꾸도록 해주는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건강 소모임에 연결시켜주어 건강한 일상을 꾸리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 주민들의 쉼터이자 사랑방이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직원들도 행복한 진료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환자나 소비자로 의사나 간호사에게 의료서비스를 요구하는 관계가 아니다. 조합원 대 조합원으로, 즉 시민이자 동료로 동등하게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과도한 친절이나 필요이상의 야간진료를 요구하지 않는다. 직원들도 자기계발 시간이 필요하다. 간호사 복장도 여성성을 강조하는 옷이 아니라 업무에 편한 디자인이 옳다고 생각한다. 몸매가 드러나고 옆구리 살이 보일까봐 조심스러운 옷은 적합지 않다. 이런 모든 것들을 조합원들이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   

# 주민참여 없이 난립하는 사이비 의료생협들

: 최근 편법 의료생협의 난립이 문제시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개원하는 것에 곤란함이 있지는 않은가?

: 은평구에도 이미 한 곳이 있다. 그곳은 치과진료를 하는 곳이다. 주민들 중에는 우리가 그곳과 같은 곳으로 오인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유사의료생협에서 우리에게 전화를 해서 “어느 업체를 통해 돈이 얼마나 들었나?” 묻기도 하고, 심지어 너무도 당당하게 “조합원 명단을 공유하자”고 말하기도 한다. 유사의료생협이 주민참여 의료생협 창립총회 사진을 홈피나 카페에서 가져다가 자신들의 창립총회 사진으로 조작하는 경우도 있고, 조합원 모집을 위한 설명회에서 한국의료생협연대 사이트를 보여주면서 자신들이 곧 소속될 단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 방송사 파업만 아니면 <피디수첩>에 제보할만한 내용인 것 같다. 최근 복지부가 유사의료생협을 단속할거란 뉴스가 있더라. 

: 복지부가 한국의료생협연대와 협력하여 주민참여 의료생협은 살리고 유사의료생협은 단속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유사의료생협도 법적 하자는 없기 때문에 서류상의 단속은 무의미하다. 단속근거도 애매하다. 한국의료생협연대도 전국 15개의 주민참여 의료생협의 연대체이지, 단속과 인증의 법적 지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국 225개의 의료생협 중 한국의료생협연대에 속한 15곳을 제외한 의료생협이 모두 영리목적의 편법적인 의료생협인지도 알 수 없다. 그걸 알기 위해서라도 전체 의료생협에 대한 실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서, 지금 안성의료생협이 가장 먼저 실사를 받고 있다.(웃음) 한국의료생협연대의 입장은 영리목적으로 운영되는 유사의료생협과 주민참여 의료생협의 중간에 위치하는, 즉 회색지대의 의료생협도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사조사도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선을 긋고 단속일변도의 입장을 취하긴 보다는, 물밑으로 접촉하면서 가능한 회색지대의 의료생협들이 주민들의 참여도를 높이도록 견인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 단속보다는 우리 스스로 옳은 근거를 찾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즉 진짜 의료생협은 무엇을 하기 때문에 좋고, 유사의료생협은 무엇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쁜지의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있다.

: 체크리스트라니, 병원인증이 생각나서 지겨워지려고 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 의료생협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주민참여가 실제로 얼마나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진료실에서 환자는 의사에게 자신의 고통을 요약해서 말한다. 그러나 의료생협이라는 공동체에서는 전혀 다른 맥락과 접점이 존재한다. 가령 어떤 유명한 의사가 아토피 강좌를 열어 “아이들에게 사랑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하면 엄마들이 감동해서 펑펑 운다. 3분 진료보다는 낫지만, 그것도 일방적인 교육일 뿐이다. 하지만 의료생협 소모임에서 아토피 아이들의 엄마들이 모이면 서로간의 이야기를 통해 다른 국면들이 펼쳐진다. 그들이 주위에서 받는 ‘애정결핍론’의 시선들 때문에 오히려 고통스러워한다는 고백들이 쏟아진다. 등장인물들이 많고, 장면이 많아진다. 서로 개입하면서 다양한 층위에서 치료역할을 한다. 진료실에서 같은 프로토콜을 행하더라도 의사소통의 방식이 달라지면 주체가 바뀌고 관계가 바뀐다. 

# 여성주의 의료를 고민하다

: '여성주의 의료'라는 것이 뭘까. 총론적으로 말하자면, 의학전체가 '백인 이성애자 성인남성'을 표준으로 삼은 담론이라고 래디컬한 주장을 펼 수도 있지만, 각론의 차원에서 실무적으로 접근하자면 어려운 이야기이다. 

: 일단은 여성들이 편하게 진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은 진료실에서 의사소통에 불편함을 겪는다. 가령 통증을 표시하는 검사에서 여성의 점수는 남성의 점수보다 낮추어서 환산하는 게 있다. 즉 여성은 통증을 과장한다고 보는 것이다. 처음엔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여성주의 병원을 만들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비자인 여성을 여왕처럼 모시는 병원은 지극히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미 존재한다. 하지만 여성이 소비자로서 여왕대접을 받는 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평등한 협조자적인 관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 등이 필요하다. 현재 진료권은 의사에 의해 독점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해왔던 보살핌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달라져야 한다. 두 번째로 여성운동에서 의사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국면들이 있다.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의 경우뿐만 아니라, 채용신검에 있어서까지 자문이 들어온다. 가령 외국계 항공사가 여승무원을 채용하는데 유방촉진 등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유방촉진으로 유방암을 검진할 수는 없고, 보형물이 있는가를 가리자는 것인데, 유방보형물이 기내근무나 사고가 일어났을 때 실제로 문제를 일으키는지, 의학적인 근거는 있는지 등을 답해줄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 성소수자들을 위한 건강 강의도 한다고 들었다.

: 성수자들을 비롯해 약자들이 안전하게 진료 받을 수 있는 진료실을 만들고 싶다. 성소수자에게 친근한 진료를 위한 매뉴얼이 필요하다. 나이 든 여성은 당연히 이성애나 임신·출산의 경험이 있다고 생각해서 자궁경부암 검사를 한다. 하지만 비혼이나 레즈비언의 경우 삽입성교 경험이 없는 사람도 있다. 이런 분들에게 질경을 삽입하는 것은 대단히 폭력적이다. 이런 분들에겐 자궁경부암 예방백신(가다실)도 당연히 필요 없다. 오히려 가다실이 게이들의 항문 암의 예방에 효과적이라는 연구가 있다. 트렌스젠더의 경우 성호르몬을 계속 사용하는데, 반드시 끊어야 하는 경우를 알려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분들이 병원에 오는 것을 기피해서 추적관찰이 잘 되지 않는다. 성소수자 건강문제라면 곧바로 에이즈를 떠올리고 위험을 과장하기 때문에, 병원 오기를 꺼려하는 것이다. 성소수자들에게는 에이즈 이외에 술, 담배, 약물, 영양 등 여러 가지 건강위험요소들이 많다. 이분들에게 맞는 질병과 건강정보를 주어야 한다.(2012년 6월1일 7시30분. 홍대 KSCRC 커뮤니티룸에서 살림의료생협주관 추혜인님의 강의 '건강한 퀴어로 살아가는 열 가지 방법'이 열릴 예정이다.)


한편에선 영리병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다른 한편에선 의료생협을 통한 공동체적 해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살림의료생협이 공동체적 해법에 대한 바람직한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들이 자신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일을 벌였으며,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함께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36살까지 비혼이던 나에게도 비혼 여성의 건강과 노후는 절박한 고민이자 현실적 공포였다. 하지만 나와 같은 이들과 만나 해결하고자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하고 있다. 그 시도 자체가 의미 있는 도전이다. 서울, 고양시, 일산시에 사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살림의료생협 (http://cafe.daum.net/femihealth)의 조합원이 될 수 있다. 용감하고 멋진 언니들이 꿈꾸는 건강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면 참여하시라. 혹시 아나? 즐거운 수다와 간섭 속에서 뱃살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동시에 떨어져나가고, 내 몸에 대한 ‘근자감(?)’으로 충만해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지.

P.S 의료생협에 관심이 있다면, <가장 인간적인 의료> (임종한 외. 스토리플래너. 2011)를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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