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대책 내용 상당수 이전 정부 때부터 추진해온 정책
건보 국고지원 근거 사라져...기존에 확보한 지원 예산도 못 쓰는 판
尹 "건강보험 모자라면 정부 재정 투입해서라도 바꾸라"

[라포르시안] "건강보험이 모자라면 정부 재정을 투입해서라도 바꾸라"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2일 서울대 어린이병원을 방문해 소아의료체계 강화를 강조하며 한 발언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아이들 건강을 챙기는 것은 국가의 최우선 책무”라고 강조하고 “관련 부처는 필요한 어떠한 자원도 아끼지 말라”고 당부했다. 

보건복지부는 이날 대통령 일정과 연계해 '소아의료체계 개선대책'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중증소아 의료체계를 조속히 확충하고 의료기관에 대한 보상을 확대하며, 소아진료를 담당할 의사인력 양성 체계를 개선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복지부가 윤 대통령의 서울대 어린이병원 방문에 맞춰 발표한 개선대책은 실효성도 의문이지만 앞서부터 계속 추진해온 것을 모아 짜깁기한 수준이다. 

핵심 대책이라고 할 수 있는 어린이 공공전문진료센터를 추가 확충하고, 지원을 강화하는 방안만 보더라도 2016년 제1기 공공전문진료센터를 지정한 이후 계속 확대하고 있다. 어린이 공공전문진료센터가 병원 운영 문제에 대한 걱정 없이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의료적 손실을 기관 단위로 사후보상하는 시범사업도 작년부터 계획해 올해 1월부터 시작했다. 

서울, 인천, 경기 등 8개 지역에 설치돼 있는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를 미설치 권역 중심으로 4개소를 추가 설치한다는 계획도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이다. 복지부는 2016년부터 소아응급진료 특수성을 고려한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 지원사업을 추진하면서 센터 지정을 계속 추가해 왔다.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등 상당수 내용은 앞서 공개한 '필수의료 지원대책'에 포함된 내용일뿐더러 이전 정부에서도 지속해 추진해온 방안이다. 

무엇보다 윤석열 정부에서 마련한 의료체계 개선 대책은 의료공백이 발생하거나 미충족 의료수요가 큰 영역에 전문센터 등을 추가로 설치하는 방안이 핵심이다. 

권역응급의료센터를 중증응급질환에 대한 최종치료 기능을 포함해 중증응급진료 역량을 갖춘 '중증응급의료센터'로 개편해 현행 40곳에서 50~60개 내외로 확충하는 것을 비롯해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 및 야간·휴일 소아환자 진료 제공 기관(달빛어린이병원 등) 확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문제는 이런 센터를 추가로 확충하고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과 인력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다. 

윤 정부가 제시한 방안은 건강보험 재정에서 공공정책수가를 신설해 운영을 지원하는 방식이 거의 전부다. '공공정책수가'란 말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건강보험 재정에서 돌려막기를 하겠다는 거다. 

건강보험 재정 총액을 늘리기 위해서 정부 예산지원을 확대하는 것도 아니고 건강보험 의료수가 관련해 3차 상대가치점수 개편과 연계해 종별 가산율을 조정하는 방식을 적용하겠다는 게 골자다.  

복지부는 3차 상대가치점수 개편에서 검체?영상 검사 등에 적용하는 종별 가산을 전면 폐지하고, 이를 통해 확보한 건강보험 재정을 입원료 및 외과계 수술 보상 강화에 활용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또다른 방법으로는 ▲자기공명영상(MRI) 및 초음파 검사 등 급여 항목과 기준에 대한 재점검 ▲공정한 건강보험 자격관리 ▲합리적 의료이용 유도 ▲재정누수 점검 등으로 건강보험 급여 지출을 줄여서 생긴 재정을 필수의료 지원 등에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필수의료 지원과 소아의료체계 개선을 위해 드는 돈을 추가적인 재정 투입보다는 기존 건강보험 보장성 영역에서 급여기준을 축소하거나 종별가산 손질 등의 방법으로 쥐어짜내 '돌려막기'를 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의료계에서는 필수의료 지원과 육성을 위해 추가적인 재정 투입이 아니라 건강보험 재정 안에서 상대가치점수 조정 등 종별, 분야별 보상체계조정 방식으로 적용할 경우 또 다른 의료취약 분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게다가 건강보험에 대한 국고지원 관련 국민건강보험법과 국민건강증진법 관련 조항이 작년 말로 일몰이 적용돼 법적 근거를 상실했다.  

현행 건강보험법 제108조(보험재정에 대한 정부지원) 1항은 '국가는 매년 예산의 범위에서 해당 연도 보험료 예상 수입액의 100분의 14에 상당하는 금액을 국고에서 공단에 지원한다'고 규정해 놓았다. 국민건강증진법 관련 부칙에는 '보건복지부장관은 제25조제1항의 규정에 불구하고 2022년 12월 31일까지 매년 기금에서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른 당해연도 보험료 예상수입액의 100분의 6에 상당하는 금액을 건보공단에 지원한다'고 규정했다. 

작년 12월 건강보험 국고지원을 연장하거나 폐지하는 등 법개정이 무산됐다. 법적 근거가 사라지면서 정부가 올해 건강보험 지원 예산으로 편성한 10조9702억원을 집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국고지원 관련 법개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건강보험 가입자 보험료도 대폭 인상할 수밖에 없다. 

결국은 필수의료 지원을 명분으로 한 추가재원 부담은 보험료 인상 등으로 환자한테 떠넘겨 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건강보험이 모자라면 정부 재정을 투입해서라도 바꾸라"고 지시했다. 국민이 내는 보험료로 조성하는 건강보험 재정은 독립성과 전문성이 담보돼야 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한 발언이다. 

건강보험 재정 관련한 중요 사항은 가입자 대표 등이 참여하는 '건강보험 재정운영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한다. 건보 급여기준, 요양급여비용, 보험료 등 건강보험정책에 관한 중요사항은 의료공급자 대표와 가입자 대표, 공익대표 등이 참여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결정하도록 돼 있다. 

전임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를 건보재정을 파탄 낸 '인기영합적 포퓰리즘'으로 몰아세우고 비판하면서 또다른 정책을 위해 '건강보험이 모자라면 정부 재정을 투입'하라고 지시하는 건 뭔가 이상하다. 

건강보험 국고지원에는 소극적이고, 공공의료 확충에 대한 계획은 부재하고, ‘건강보험 지출 효율화’(보장성 축소)를 강조해오던 기조에서 "건강보험이 모자라면 정부 재정을 투입해서라도 바꾸라"고 지시하는 건 느닷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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