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호(前 보건의료노조 정책연구원장)

[라포르시안] 그를 떠올릴 때 먼저 생각나는 건 늦은 밤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다. 어둠 속 정적을 깨면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눈앞에 불쑥 나타난 울퉁불퉁한 주먹처럼 경계심을 일깨운다. 실제로 그는 늦은 밤이나 새벽 시간에도 취재요청 전화와 메시지를 보내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전화해 밑도끝도 없이 노조탄압 현장 취재를 와달라고 하거나 하루 전날 갑자기 전화해 먼 남쪽 지방도시에 취재를 가자며 재촉한다. 진주의료원 폐업 저지 투쟁 때도 그랬고, 서해 최북단 백령도에 있는 공공병원을 찾아 갈 때도 그의 동행요청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이따금 울리는 그의 전화벨 소리는 '문제적 상황'을 바라보는 무딘 마음의 날을 벼리게 했다. 

그가 있는 곳이 보건의료노조의 치열한 투쟁 현장이었고, 그가 부재하는 곳이 또한 언젠가 투쟁의 대상이 될 공간이었다. 1993년 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병원노련) 서울본부에서 활동을 시작으로 1998년 국내 첫 산별노조로 출범한 보건의료노조로 이어지며 30년을 꽉 채웠다. 그는 보건의료 노동운동의 지략가이자 선동가였다. '돈보다 생명을'이란 구호 아래 보건의료 노동운동의 기치를 내걸고, 산별노조 조직에 걸맞는 전략으로 협상과 투쟁의 동력을 끌어모았다. 

지난달 18일 보건의료노조 생명홀에서 열린 정년퇴임식 때 후배 활동가들이 '보건의료노조 고유명사'라고 새겨진 감사패를 건넸다. 지난 30년간, 그는 개별적이고 독보적인 보건의료노조 활동가이면서도 보편적인 보건의료 노동운동 활동가였다. 그러기에 '이주호가 있는 보건의료노조'에서 '이주호가 없는 보건의료노조'로 전환점을 맞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할 말이 많을 듯싶고, 또 물어볼 말도 많아 떠나는 그를 잠시 붙들었다.  


-  보건의료노조에서 상근활동가로 30년을 맞았고 2023년을 끝으로 정년퇴직을 맞았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 지난 연말 정년퇴임식을 할 때 후배들이 감사패를 만들었는데 제목이 ‘보건의료노조 고유명사’ 였다. ‘보건의료노조 이주호 단장(원장)’ 이라는 호칭이 모두에게 익숙할만큼 오래 일했다. 1993년 시작해서 독일 석사과정 유학 1년, 민주노총 정책실장 3년 파견을 제외하고 꼬박 30년을 보건의료노조에서 선배 동료 후배들과 동고동락했다. 당시 노동계에서 우리 노조 별명이 ‘불이 꺼지지 않는 보건의료노조 사무실’ 이었다. 우리 스스로 병원이 365일 밤낮없이 돌아가니 우리도 그렇게 일해야 한다고 야근과 특근을 밥 먹듯이 했다. 많은 586 친구들이 현장에 투신했다가 대부분 현장을 떠났지만 우직하게 현장을 지키다 정년을 맞이한 것에 그 어떤 후회는 없다.

제가 고대 사회학과를 나왔는데 지난 10월 창립 60주년 행사때 사회공익부분에서 ‘사회학과를 빛낸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상을 받았다. 12월에는 고대 노동대학원에서 시상하는 2023 한국노동문화대상에서 노동정책·복지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노동운동 자체가 개인보다 조직을 앞세우다 보니 개인이 상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정년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뒤늦게 지난 활동에 대해 평가를 받은 듯해서 더 만감이 교차하는 것 같다. 2021년 임을 위한 행진곡 원작자인 백기완 선생님 장례식 때 ‘남김없이’ 라는 추모리본의 글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때 정년을 생각하면서 정말 ‘남김없이’ 다 쏟아붓고 미련없이 조직생활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지난 30년 ‘남김없이’ 열심히 활동했다고 자부한다.  

- 보건의료 노동운동에는 어떤 계기로 뛰어들게 됐나.

= 80년대 말 인천에서 현장 노동운동을 하다 선배의 추천으로 당시 사무전문직 노동운동의 새로운 영역인 병원노련 활동을 시작했다. 제조업 노동운동에서 사무전문직 노동운동으로의 이전에 대한 새로운 기대가 있었다. 활동하면서 병원 노동자 특히 간호사 등 교대노동자들의 힘든 현장노동을 지켜보면서, 무엇보다 노동운동 투쟁에 있어 무한한 가능성과 역동성을 체험하면서 점차 보건의료 노동운동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양대 노총 합쳐서 30여개의 산별연맹이 있지만 보건의료노조가 활동력에 있어서 최상위 수준이라 자부한다. 

- 보건의료노조에서 정책기획실장, 전략기획단장, 정책연구원장을 수행했고, 민주노총 정책실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보건의료 노동운동 분야 대표적인 전략기획가이자 의제 설정에서 브레인 역할을 했다. 국내 첫 산별노조라는 상징성과 외부에서 주목하는 눈길이 많다는 점에서 사업 의제를 선정하고 전략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부담감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실제로 어땠나.    

= 돌아보면 2004년 주 5일제 전면시행을 내건 최초 산별교섭 성사, 2009 보호자없는 병원 사업 본격 시작, 2011년 보건의료인력지원특별법 첫 국회 발의, 2021년 코로나 위기극복위한 9.2 노정합의, 2023년 간호사대 환자비율 1:5 제도화와 간호간병통합서비스 전면확대를 위한 산별 총파업 등 몇 가지 의제와 투쟁은 우리 보건의료노조가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이런 중요한 투쟁 관련 의제 선정은 노동조합이다보니 항상 내부 다양한 의결기구의 토론과 결의 절차를 거쳐야 된다. 내가 많은 기획을 하고 제안했지만 그것을 만든 것은 결국 지도부와 중앙과 지역본부 간부, 현장 조합원들의 꾸준한 실천과 투쟁이었다. 우리 보건의료노조간부와 조합원의 역동성을 믿었기에 새로운 도전과 시도에 주저함이 없었다. 모든 사업은 ‘우문현답’ 이다. 바로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것이다. 

- 2022년 실시한 보건의료노조 '조직진단' 결과를 보면 전체 조합원 중 약 68%는 2030세대인데 반해 전임 간부는 4050세대가 60~70%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직 내에서 장년 세대와 청년 세대 조합원 간 세대 갈등도 심해지고 있다는 인식이 높았다. 조합원의 연령구성 변화에 따른 세대차이 혹은 세대갈등을 현장에서 실제로 체감하고 있나. 

= 최근 청년담론, MZ 세대담론이 건강하지 못하게 왜곡되어 갈등 중심으로만 논의되는 측면은 아쉽다. 우리가 진단한 청년세대 조합원들은 여전히 건강하고 역동적이다. 하지만 조직문화에서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헌신과 봉사 희생이 노조 활동의 대명사였는데 이젠 주말집회, 야간순회, 긴 회의, 의무적인 회식 참가 등에 있어 청년세대들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라떼식' 어법으로는 세대 간 차이를 넘어 진정한 통합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최근 들어 파업 참가 양상도 다르다. 이전엔 중간관리자의 탄압으로 주저했다면 요즘은 자신이 옳다고 판단하면 파업에 소신껏 참가한다. 

- 2023년에 보건의료노조 창립 25주년을 맞았다. 90년대 말 산별노조를 처음 조직하고 꾸려온 1세대 상근활동가들이 일선에는 물러나는 세대교체기를 맞았다. 보건의료노조 조직체계와 운영 방식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 같은데, 어떤 변화가 찾아올 것으로 예측하나.

= 이전에는 시스템보다는 사람이 일을 했다. 몇몇 1세대 선배들이 밤낮없이 사무실에서 몇 사람 몫의 일을 해냈다. 새벽 3시에 긴 회의가 끝나면 몇 사람이 남아서 그날 출근하는 조합원들에게 나눠줄 선전물을 만들었다. 결국 밤을 꼬박 세게 된다. 일에 사람을 맞추는 시대였다.

이제는 조합원 숫자도 3만에서 9만으로 세배 커졌고, 중앙간부들도 20여명에서 70여명으로 늘어났다. 간부평균 연령도 1세대 활동가들이 물러나면 30대로 확 떨어질 것이다. 학생운동 출신 간부도 줄었다. 따라서 이제는 사람에 일을 맞추는 시대, 시스템이 일하는 조직이 될 것이다. 1인 3역 4역 하던 시대에서 1인 1역 시대로 될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그동안은 희생과 헌신만으로 일해온 노동운동가 활동가들이 이제는 제대로 노동의 가치를 보상받으면서 일하는 정상적인(?) 조직이 될 것이다.

2023년 12월 18일, 보건의료노조 생명홀에서 박노봉 부위원장, 이주호 정책연구원장, 방기원 교육위원장의 정년퇴임식이 열렸다. 사진 왼쪽부터 이주호 정책연구원장, 박노봉 부위원장, 방기원 교육위원장. 사진 제공: 보건의료노조
2023년 12월 18일, 보건의료노조 생명홀에서 박노봉 부위원장, 이주호 정책연구원장, 방기원 교육위원장의 정년퇴임식이 열렸다. 사진 왼쪽부터 이주호 정책연구원장, 박노봉 부위원장, 방기원 교육위원장. 사진 제공: 보건의료노조

- ‘돈보다 생명을’이란 구호는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 보건의료 노동운동을 이끌 의제로서 이 구호는 여전히 유효한가.

= 이 이야기는 처음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 말만 나오면 나를 포함해서 몇 사람이 서로 원조라고 주장하며 싸운다(웃음). 시작은 2003년인가, 그때 철도노조가 ‘돈보다 안전’이라는 포스터를 지하철 역사에 붙인 적이 있다. 그걸 보고 온 간부가 그럼 우리는 ‘돈보다 생명’이라고 하면 어떨까 제안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돈보다 생명을!’ 까지 붙여야 힘이 붙는다고 하면서 이후 각종 행사 때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외국에 나가보니 노조와 시민단체들이 ‘people before profit’ ‘patient before profit’ 라는 구호를 많이 사용하더라. 한국 시민단체도 ‘이윤보다 안전’이란 식의 표어를 쓰곤 했는데 우린 이윤보다 ‘돈’이 더 대중적으로 의미전달이 잘 되는 듯해 그대로 계속 사용했다. 그 이후 다른 노조나 단체에 가서 우리 노조를 소개할 때마다 이 구호가 너무 좋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는 정치권에서도 대선 때 우리 구호를 무단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지난 12월 국회 앞 단식농성장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방문했는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조 구호라고 하면서 ‘돈보다 생명을’ 이라는 글귀를 방명록에 남겼다. 한국 의료가 돈벌이 수단으로, 민영화 논란이 되면 될수록 이 구호는 여전히 현실에서 유효하고 그 가치는 더욱 빛날 것 같다.

 ‘돈보다 생명을’, 한국 의료가 돈벌이 수단으로, 민영화 논란이 되면 될수록 이 구호는 여전히 현실에서 유효할 것 

 - 보건의료노조는 그동안의 산별교섭에서 다양한 산별의제를 제기했고, 의료현장에 적용하는 성과도 이뤄냈다. 대표적인 성과를 꼽자면.

= 2004년 근로조건 저하없는 주5일제 시행을 합의하면서 여성 다수사업장으로서 생리휴가 무급화에 맞서 유급휴가를 지켜냈다. 2007년에는 당시 비정규직법안 시행으로 사회적 갈등이 심했는데 ‘아름다운 합의’ 로 불리는 비정규직 정규직화 산별합의를 하면서 정규직 임금의 일부를 양보해서 연대임금을 실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2021년 감염병 대응과 기후위기 노사공동대응, 2022년에는 병문안 문화개선, 누적 유급수면휴가제, 유급헌혈휴가 도입, 2023년에는 대리처방 금지등 불법의료 근절, 인력충원 등에 합의해서 의미있는 현장의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 2004년 의료민영화 저지와 주 5일제 보장 등을 요구하며 보건의료노조가 첫 산별 총파업을 벌였다. 14일 간 이어진 총파업을 통해 ‘기업별교섭에서 산별교섭시대로 전환하는 노동운동의 한 획을 긋는 분기점’이란 평가를 평가받고 있다. 보건의료노조에 있어서 2004년 산별총파업은 어떤 의미인가. 

= 1998년 기업별노조에서 산별노조로 전환했지만 완전한 산별노조로서 기능하지 못했다. 2004년 산별총파업을 통해 비로소 완전한 산별노조로서의 조직적 통일성을 확보했다. 참가한 조합원 스스로가 산별노조의 진정한 힘을 느끼게 되었다. 기업별교섭을 뛰어넘어 모든 병원 노사가 참가하는 산별교섭 시대를 열었다. 그 힘으로 2007년 보건의료사용자단체가 출범했다. 한마디로 무늬만 산별노조에서 제대로 된 산별노조로 가는 사실상 출발점이 된 역사적 투쟁이었다. 노동계에서도 의제와 규모, 방식 모든 면에서 제대로된 산별총파업이라고 평가한다.

- 보건의료 분야의 오랜 산별노조 활동에도 불구하고 병원 사용자가 노조를 대하는 방식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다. 여전히 변변한 병원사용자 교섭대표단체도 부재한 상태다. 병원 사용자의 이런 행태는 어디에서 기인한다고 보는가 

= 의료기관은 일반기업과 다른 특수한 기관이자 비영리법인이다. 과학적 조직관리, 경영 투명성, 민주적 거버넌스가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의사중심의 인력운영으로 전체 직원에 대한 인력관리 관점도 허술하다. 병원장인 의사들은 의대 교육부터, 병원에 와서도 진정한 CEO로서 민주적 리더쉽 훈련의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병원장을 맡은 원로 교수는 수천명이 일하는 대규모 직장에서의 소통과 대화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대등한 노사관계, 노동인권에 대한 기본개념에 익숙하지 않다. 오너쉽이 강한 중소병원장은 더더욱 노조와 대등한 대화를 거부한다. 용납이 안된다. 게다가 그런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줄 수 있는 병원협회는 노사관계에서의 역할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병원이 노동집약산업이고 인건비 비중이 50% 넘는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다는 반증이다. 그런 점에서 병원 사용자와 병원협회는 노사문제와 인력문제에 대해 보다 더 전향적인 태도변화가 필요하다. 

- 보건의료 분야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요인(저출산 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 의료자원 수급 불균형 등)에 대응하기 위해 의사, 간호사 등 전문직종 집단이 추구해야 할 방향과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활동하면서 이 부문이 늘 아쉬운 대목이다. 보건의료노조 소속 모 대학병원에게 물어보니 근무하는 직종이 총 53개였다. 이처럼 의료기관에는 수많은 직종이 일하고 있는데 그들을 직종별로 대표하는 것이 직종협회다. 협회가 주장하는 회원 숫자를 다 합치면 450만명이다. 실제 일하는 숫자는 110만명 조금 넘는 것 같다. 이들을 대표하는 조직 중 대표적인 것인 대한의사협회와 대한간호협회이다. 간호법을 추진하는 간협, 의대정원 확대를 반대하는 의협이 최근 좌절을 맛보았다. 내가 볼 때 좌절의 여러 요인 중 하나는 보건의료계 내부부터 함께하기위한 연대 노력 부족이다. 상대방을 설득하는 과정이 없다. 각 협회의 내부정치도 고민해봐야한다. 일부 강경 세력에 의해 협회의 입장이 좌지우지되면서 휘둘리거나, 다양한 현장 의견에 대한 민주적 수렴과정이 부족하다. 다수의 직종협회는 너무 존재감이 없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우리 사회가 좀 더 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부와 정당, 노조, 시민단체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의료와 복지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를 대변하는 직종협회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경우 의료 관련 가장 영향력있고 존경받는 사람이 후생노동성 장관이 아니라 의협 회장이라고 한다. 지난 10월 미국에서 개최된 간호사 국제회의를 갔더니 어느 발표자료에 미국 직업 중 국민 신뢰도 1위가 간호사였고 2위가 의사였다. 우리는 어떨까. 한번쯤 돌아보고 함께 토론해볼만한 대목이다.

- 의사단체가 의대정원 확대 추진 등에 반발해 ‘파업(집단휴진)’ 투쟁에 나서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자영업자인 개원의사와 수련의인 전공의 등의 노동자성은 어떻게 봐야 하나. 다른 보건의료노동자의 파업과 의사 파업을 다르게 봐야 하나.  

= 일단 파업이란 용어는 부적절하다. 의사 스스로가 평소 노동자성을 부정하다가 투쟁을 할때만 노동권의 일환인 파업권을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단체행동은 가능하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의협 단체행동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는 건 투쟁 그 자체보다 요구의 적절성 여부이다. 

의사 단체행동 과정에서 전공의의 입장은 늘 아쉽다. 전공의노조를 처음 만들 때 가까이서 지켜본 적이 있고 지금도 관심이 많은데 최근 활동이 거의 유명무실한 것 같다. 본인들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밖에서 볼 때는 의협 선배들 투쟁의 선봉대 역할만 보인다. 의사집단 중 가장 힘들게 일하고 있는 청년의사로서 열악한 근무환경 개선을 쟁점화하기보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못하는 의협 투쟁에만 앞장서는 모습이 아쉽고 안타깝다. 우리는 전공의들의 장시간 노동 근절과 적정 환자 비율 제도화 관련해 병원 현장에서 같은 사용자를 상대로 연대투쟁할 용의가 있다. 

- 최근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이 “2000년 의사파업은 저수가 체계 등 한국 의료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촉발된 의료개혁운동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연구보고서를 냈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나.

= 동의가 안 된다. 의협은 늘 ‘기승전 저수가’다. 우리나라 수가제도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수가가 아니라 불균형등한 수가 문제이다. 검사와 약값은 높고 사람에 대한 수가는 낮다. 수가 문제는 낭비적인 의료이용체계를 개선하면서 함께 가야한다. 필요하다면 중증 필수의료, 지역의료 중심으로 수가를 올려야한다. 의협이 좀더 균형감 있게 국민의 입장에서 의료개혁운동을 함께하면 좋겠다. 

의사 스스로 노동자성을 부정하다가 투쟁 할때만 파업권 운운하는 건 어불성설

의협이 좀더 균형감 있게 국민 입장에서 의료개혁운동 함께 해야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갈수록 대형화하는 병원에서 보건의료 노동자는 의료서비스 공급 과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노동환경에 영향을 주는 의료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배제된다. 이런 경향은 앞으로 더 심화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나 대안이 있다면.  

= 원칙적인 답변이지만 결국 노조조직 확대와 투쟁밖에 없다. 특히 병원 내에서 하는 투쟁은 한계가 분명한 만큼 초기업 의제를 중심으로 한 초기업 투쟁을 해야한다. 정부 산하 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해 현장과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야한다. 무엇보다 산별노조가 정책역량 강화를 통해 새로운 의료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위한 정책대안을 준비해야한다. 정치적으로도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국회와 지방의회 진출을 적극 모색해야한다.

- 위의 질문과 관련해 보건의료 정책 결정에 있어서 전문가 단체뿐만 아니라 시민, 보건의료 노동자 등이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큰 틀의 사회적 거버넌스 구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를 구체화하고 추진하는 것이 가능할까. 

= 윤석열 정부 들어와서 의미있는 사회적 대화, 큰 틀의 사회적 거버넌스 구축 논의 자체가 실종되었다. 기존에 있던 일자리위원회는 없어지고,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인력정책심의위원회 등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정부 각종 위원회는 축소 운영되거나 잘 열리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노조는 물론 환자단체, 시민단체, 소비자단체 등이 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직종협회도 함께 하면 좋겠다. 지역사회통합돌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직역 간 학제 간 칸막이가 너무 높다고. 우리 내부의 칸막이를 없애면서 정치적으로는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초고령화사회, 지역소멸에 대응하는 제대로된 보건의료 복지 거버넌스 구축을 함께 요구하고 싸워야한다. 

- 최근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에서 시상한 '2023년 한국노동문화대상'을 수상했다. 수상 소감에서 '사회운동노조주의'를 화두로 현역은퇴 이후 삶의 후반전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 노동조합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그 역할이 조금씩 변화한다. 지금 초고령화 사회, 기후위기시대. 불평등 양극화 사회에서는 노조가 그 어느 때보다 경제주의적 임단협 투쟁에만 머물지 말고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조직노동자-미조직노동자 가 함께 하는 사회연대 노동운동, 사회적 의제를 던지는 노동운동을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현역은퇴 후 고대에서 그동안 미루고 미루어 왔던 박사 논문을 쓸 예정인데 그럼 문제의식을 구체화하는 내용으로 쓸 예정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후반전 활동을 준비하고자 한다. 모든 노동자들을 위한 연대와 함께 국민들에게 박수 받을 수 있는 그런 노동조합 활동을 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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