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숙(클라리파이 사장)
[라포르시안] 영상의학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CT·MRI 등의 진단 정확도와 속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향상됐다. 특히 CT는 전신의 다양한 질환을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도구로 ▲응급의료 ▲암 진단 ▲정밀검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영상진단 장비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CT의 의학적 유용성과 기술적 편리함의 이면에는 좀처럼 조명되지 않는 중요한 건강 이슈가 있다. 방사선 피폭에 따른 암 발병 위험이다. 더 큰 우려는 의료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방사선량의 안전성 기준이 여전히 과거 원폭 생존자 연구 자료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는 방사선이 인간에게 암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됐다. 이들은 수백 mGy(밀리그레이) 이상의 매우 높은 방사선량을 단시간에 받았는데, 이를 바탕으로 방사선량과 암 발생 사이의 인과관계를 도출해 낸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방사선 노출 환경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의료영상 기반의 저선량 방사선 환경과는 매우 다르다. 오늘날 CT 검사는 보통 수십 mGy 수준의 비교적 낮은 선량이지만 수초 이내 고선량률로 매우 빠르게 조사된다. 이 같은 저선량·고선량률 형태는 세포의 방사선 손상복구 작용이 개입할 시간조차 없이 암 유발 가능성을 남긴다는 점에서 과거 원자 폭탄의 ‘고선량-고선량률’ 모델과는 질적으로 다른 환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방사선 안전 기준과 위험추정 모델은 여전히 과거 원폭 생존자 데이터를 주요 근거로 삼고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CT 검사나 기타 저선량 영상 검사에서의 실제 위험이 과소 평가될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는 바로 이러한 지점을 재조명하고, 현 시점에서의 방사선 위험 평가 필요성을 제기하는 ‘TG91 보고서’ 초안을 최근 공개했다. ICRP는 ‘저선량 및 저선량률에서의 고형암 방사선 위험 평가와 관련된 과학적 증거’(Scientific Evidence Relevant to the Assessment of Solid Cancer Radiation Risk at Low Dose and Low Dose Rate)를 제목으로 한 해당 보고서 초안에 대한 의견을 오는 6월 13일까지 수렴한다.

TG91 보고서는 단순한 연구 결과가 아닌 전 세계 방사선 방호 표준을 제시해 온 ICRP의 수년에 걸친 과학적 검토와 국제 협업의 결정체다. 1928년 설립된 ICRP는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원자력기구(IAEA) ▲유엔 방사선영향과학위원회(UNSCEAR) 등과 협력하며 방사선 방호 기준의 과학적 근간을 제공해 왔다.
이러한 ICRP 권고는 유럽연합(EU)·미국·일본·한국 등 다수 국가의 방사선 규제 정책에 직접 반영되고 의료기관·공공기관의 방사선 안전 시스템의 기준점이 돼왔다. 특히 ICRP의 권위를 바탕으로 저선량·저선량률 방사선에 의한 암 위험에 대한 최신 증거들을 집대성한 TG91 보고서는 단순히 과거 모델을 반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간 축적된 수백 건의 동물실험·세포생물학 연구·후성유전학적 분석, 수십 개의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한 역학 메타분석을 철저히 재검토하고, 과학적으로 정제된 근거만을 선별해 체계적으로 통합했다. 또한 각 분야 최고 수준의 국제 전문가들로 구성된 TG91 작업반은 해당 자료들을 바탕으로 기존 방사선 암 위험 모델의 보정 계수들을 재검토했다.
그 결과 의료 방사선과 같은 저선량 노출일 경우에도 암 발생 위험이 존재하며, 그 근거는 단순히 원폭 생존자 데이터의 외삽(extrapolation)이 아닌 최신의 과학적 증거에 의해 지지된다고 강조했다. 향후 수년간 전 세계 방사선 방호 정책 기준이 될 것으로 평가받는 TG91 보고서는 현재 국제 공청회(public consultation)를 거쳐 ICRP 공식 권고안으로 채택될 예정이다.
이제는 대한민국도 방사선 방호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여전히 일부 의료현장에서는 “저선량이니 괜찮다” “한두 번 찍는 건 문제 없다”는 안일한 인식이 만연하다. 하지만 이미 CT 스캔 한 번으로 방사선이 수초 내 급속 조사되며 반복 검사에 따른 누적선량은 암 위험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특히 소아·청년·여성 환자에게는 더 민감한 영향이 있을 수 있다. 더 이상 과거 히로시마 원폭 피해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만을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물론 CT의 진단적 가치를 부정할 수 없지만 환자 안전과 가능한 최소한의 방사선 조사로 진단·치료 목적을 달성하는 ‘알라라(ALARA) 원칙’에 기반한 과학적 규제 강화는 시대적 의무이자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대한민국 정부와 의료계 또한 ICRP TG91 보고서에 관심을 기울이고 ▲CT 선량 기준 하향 조정 ▲선량 기록·관리 의무화 ▲불필요한 CT 반복 검사 방지 ▲환자 대상 정보 제공 등 구체적인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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