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포르시안] '새 원장이 부임해온 날 밤, 섬에서는 두 사람의 탈출 사고가 있었다'.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1962년 7월 10일부터 1964년 7월 25일까지 전남 고흥군 도양면 봉암반도와 풍양반도를 잇는 대규모 간척공사를 추진하면서 소록도에 수용된 한센인을 강제동원해 노역을 시킨 사건을 소재로 한다. '오마도 간척사업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공권력에 의한 대표적인 한센인 인권침해 사건으로 꼽힌다. '한센인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일명 한센인사건법)에 직접 명시돼 있다.
1916년 설립된 이후 1917년 5월 17일 공식 개원한 소록도병원은 한센인의 한이 서린 곳이다. 격리와 낙인, 차별로 점철된 공간이다. 이곳에선 한센인에 대한 폭행, 부당한 감금 또는 본인의 동의 없이 단종수술 등을 실시한 '한센인 격리·폭행 사건'을 비롯해 '84인 학살 사건', '오마도 간척사업 사건' 등 국가공권력에 의한 한센인 인권침해 사건이 발생했다. '당신들의 천국'일지 몰라도 한센인에겐 지옥과 다를 바 없었다.
의학의 발전으로 한센병이 완치 가능한 질환으로 바뀐 후에도 환자들은 여전히 ‘격리된 타자(他者)’로 인식되며, 사회와 분리된 존재로 살아왔다. 이재명 대통령이 방문한 자리에서 국립소록도병원 오동찬 의료부장은 “한센병은 1950년대에 처음 치료제가 개발됐고, 1980년대 한국은 WHO 퇴치기준을 달성했음에도 편견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했다. 그의 말은 의학적 진보와 사회적 인식 사이의 괴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질병에 대한 인식이 곧 인권 문제와 무관치 않음을 소록도병원이 확인시켜 준다.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가 지난 25일 국립소록도병원을 방문한 것은 ‘역사와의 화해’를 의미하는 상징적 순간이기도 하다. 현직 대통령이 한센인을 만나 손을 맞잡은 행보는 국가권력이 자행한 차별과 배제의 과거를 어떻게 마주하고, 미래로 나아갈지를 고민하게 한다.
김혜경 여사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선거가 끝나면 대통령을 모시고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날 방문은 그 말의 진정성을 증명했다. 대통령 부부가 약속을 지키며 찾아간 것은 정치적 제스처가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국가책임을 재확인하는 성숙한 리더십의 발로라 할 수 있다.
환자들의 손을 잡은 이 대통령은 “한센병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차별과 편견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긴 세월 동안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가치를 지켜오신 한센인 여러분의 삶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고 했다. 또 "정부는 앞으로도 모두가 존중받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소록도는 한센인 강제 격리와 차별, 인권 침해로 얼룩졌던 공간으로, 또 ‘절망의 섬’에서 ‘희망의 섬’으로 일군 이들의 공동체 정신이 살아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현직 대통령의 첫 국립소록도병원 공식 방문은 한센인과 사회 간 단절된 관계 회복의 첫걸음이자, 상처받은 공동체가 다시 사회 한가운데로 들어설 수 있는 문을 여는 첫걸음이다. 국립소록도병원은 단순히 치유의 공간이 아닌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 대통령의 이번 방문은 그 의미를 되새겨보자는 제안이나 마찬가지다. 과거의 어둠을 무조건 지우거나 미화하지 않고, 환자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동시에 국가가 책임져야 할 몫을 다할 때 비로소 진정한 화해와 복원이 가능하다. 소록도를 다시 사회공동체의 일부로 품는 일은 한국 사회가 질병이 아닌 ‘사람’을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센인의 격리와 낙인·차별에 관해 기억하고, 책임지고, 함께 살아가는 노력이다. 현직 대통령의 국립소록도병원 방문은 그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