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덕선(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 원장)
[라포르시안] 인구 고령화, 만성질환 증가, 필수의료의 위기, 전공의 수급 불균형, 건강보험 재정 악화 등 현재 의료 현장은 다층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에 대한 해법은 실증적 근거와 현장 데이터를 바탕으로 설계돼야 한다는 것이 의료계의 주장이다. 윤석열 정부의 의대정원 증원으로 야기된 의료사태 이후 지난 1년 이상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은 의사 인력 추계, 면허제도 개편, 수가 체계 개선, 건강보험 구조 개혁 등 보건의료 전반을 아우르는 정책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있다.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이 대전환기를 맞은 지금, 의료계 내부에서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실질적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정책 싱크탱크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의협 출입기자단은 의료정책연구원을 이끌고 있는 안덕선 원장을 만나 그간의 주요 연구성과와 정책 방향, 그리고 향후 한국 의료시스템 개혁의 조건에 대해 심층적으로 들어봤다.

- 지난 1년간 의료정책연구원이 수행한 연구 중 실제 정책이나 입법으로 이어진 대표 사례가 있나.
= 대표적인 성과는 정부의 의대정원 확대 정책에 대응한 ‘의사인력 수급 추계 연구’다. 이 연구는 단순한 숫자 예측이 아니라, 복잡한 의료환경과 인구구조를 고려한 실증 분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특히 ‘전공의 실근무일수’, ‘지역 간 병상 편차’, ‘전문과목별 수요’ 등 실제 데이터를 반영해 단기 증원에 따른 중장기 공급과잉 가능성을 경고했다. 연구 결과는 독일 최고 권위의 의료법 국제학술지 Medizinrecht에 게재됐고, 국내에서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청문회와 의사 집단행동 관련 정책토론회 등에서 주요 참고자료로 활용됐다.
또 하나의 성과는 ‘면허관리제도 개편’ 연구다. 의료정책연구원은 자율규제형 면허관리기구 설립을 주제로 TF를 구성하고, 구체적인 법·제도적 틀을 검토해왔다. 이미 세 차례 국회 토론회를 개최했고, 대한의사협회 대의원회는 면허관리원 설립 필요성을 수임사항으로 결의한 상태다. 해외 사례로는 캐나다의 의사단체 자율기구인 CPSO, 호주의 Medical Board of Australia 등을 비교 분석하며 제도화 방향을 구체화했다.
이 외에도 필수의료 지원을 위한 수가체계 개편안, 수련환경 개선안, 건강보험 개혁 프레임워크 연구 등도 의료정책연구원이 선도적으로 추진해온 프로젝트들이다. 모든 연구는 단순 이론이 아닌 현장 의료인, 학계, 정책 실무자와의 지속적 교류를 통해 축적된 성과다.
- 의대정원 증원에 따른 교육의 질을 어떻게 전망하나.
= 현재 의과대학들은 교육 인프라, 교수 인력, 실습 병상 등 전반에서 이미 포화 상태에 가깝다. 정원 확대가 단행될 경우 교육의 질은 심각하게 저하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1990년대 말 신설된 서남대학교 의대의 경우, 교육 여건 부족으로 인증 취소와 폐교라는 극단적인 결말에 이르렀다. 정원 증원은 단순히 숫자를 늘리는 문제가 아니라, 교육의 질적 구조를 함께 설계하는 과제가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 또한 실습병상 확보 역시 대단히 어려운 현실이다. 수도권 대형병원에 환자 쏠림이 심화되면서 지역 의대는 실습 환자 수 자체가 줄고 있다. 교수 확보도 문제다. 교육 전담 교수는 의료수익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병원에서 인건비 지원이 어려워 인력 충원이 지연되고 있다. 교육 현장은 이미 정원 확대 이전부터 위기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의료정책연구원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교육부와 복지부, 병원협회, 의료계가 참여하는 ‘의학교육 공동 협의체’ 구성을 제안한 바 있다. 정원 확대는 교육환경, 병원 인프라, 실습 보장, 전공의 수련체계 등과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하며, 이를 국가지원과 규제 체계를 통해 동시에 개편해야 한다.
- 전공의 수련 구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 전공의 제도는 형식적으로는 교육 중심 체계이나, 실제로는 병원 인력 보충 수단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는 구조적인 문제다. 진료 수익에 의존하는 민간 중심의 의료체계에서는 전공의를 교육보다 업무 중심 인력으로 투입할 수밖에 없는 유인이 작용한다. 그러다 보니 교육적 연속성이나 질은 뒷전으로 밀리고, 법적 근거 없이 진료보조 업무에 전공의가 동원되는 사례도 빈번하다. 특히 외과계열이나 필수의료 분야는 교육이 전무하다시피한 상태다. 실제로 복부 외과 전공의 한 명이 응급수술 수련을 받지 못한 채 수료했다는 사례도 보고됐다. 이는 전공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시스템의 붕괴를 반영한다.
의료정책연구원은 이러한 문제의 대안으로 ‘역량기반 교육(CBME)’ 시스템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연차 기준이 아니라, 실제 기술과 의사소통, 전문성, 윤리의식 등을 기준으로 단계별 피드백과 인증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미 북미나 유럽에서는 이러한 접근이 주류가 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시범 도입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전공의 수련 인증제 강화, 교육 전담 교수 확충, 전공의 평가도구의 개발 등이 병행돼야 한다.
- 현행 상대가치 수가 체계에서 의료 현장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필수의료를 강화하기 위해 가장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항목이라면.
= 현행 상대가치점수 제도는 행위의 시간, 노력을 일정한 공식으로 환산해 수가를 산정하도록 설계돼 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실제 의료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대표적으로 고위험·고부담·고난이도 진료를 수행하는 흉부외과, 외과, 산부인과 등은 낮은 상대가치로 인해 수익성이 극히 낮다. 반면, 고가의 장비가 필요한 단순 진단이나 시술은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을 보장받는다. 이런 구조는 결국 의료인의 전공 선택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환자는 필요한 진료를 받지 못하고, 의료인은 위험을 회피하는 진료만 남게 된다. 이는 보건의료체계 전체를 비효율적으로 만든다.
의료정책연구원은 수가체계 개편을 위해 '위험보정 점수', '정신적 스트레스 계수', '책임 위험 가중치' 등을 반영한 새로운 상대가치모형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고난이도 필수의료에 대한 가산 수가 신설과 공공성에 기반한 직접 지원금 제도를 병행할 필요가 있다. 미국 메디케어의 ‘Physician Fee Schedule’이나 프랑스의 ‘Forfait Structure’ 등 선진국 사례도 벤치마킹하고 있다.

- 의료정책연구원이 요구하는 면허관리제도 개편의 핵심은 무엇인가.
= 현재 한국의 면허관리 시스템은 발급은 국가가 하지만 유지·관리는 사실상 공백이다. 윤리적 위반, 전문성 유지 여부, 연속 교육 이수 등을 공식적으로 검증하거나 조정하는 체계가 없다. 의사가 처음 면허를 취득한 이후 어떤 상황에서도 면허가 유지되는 구조는 국민 신뢰 측면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의료정책연구원은 이에 대해 '의사면허관리원' 설립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정부로부터 독립된 전문 자율기구로서, 면허의 등록·유지·갱신·윤리 평가·복귀 심사 등을 총괄하게 된다. 이미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등의 면허관리기구들은 유사한 기능을 수행 중이다. 예를 들어, 영국 GMC는 전문의 면허 유지 시 정기 재인증(revalidation) 절차를 시행하고 있으며, 의사가 소속된 NHS 병원이나 교육기관의 평가도 반영된다. 한국에서도 의사 사회가 윤리와 전문성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징계 강화가 아니라, 직업적 자율성과 책임성을 동시에 강화하는 것이다. 면허관리원이 이를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 건강보험제도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크다. 의료정책연구원에서 제시할 수 있는 대안이 있을까.
= 국민건강보험은 ‘국가는 규제만 하고, 민간이 공급을 책임지는’ 모순된 구조다. 공공보험이지만 진료는 민간에서 수행되고, 민간의료기관은 사실상 국가 과세권에 가까운 수준으로 수가와 비급여를 통제받는다. 공급자와 구매자의 관계가 불분명하고, 책임 구조도 왜곡돼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건강보험 재정은 늘 위기 상태에 놓이게 된다. 또한 환자와 의사 사이에는 불신이 누적되고, 진료의 질은 평가 대상이 되지 못한 채 수가 삭감의 대상이 된다. 정부는 지속적으로 의료비 총량을 억제하려 하지만, 그 부담은 민간 의료기관과 환자에게 고스란히 전가되고 있다.
의료정책연구원은 이 문제를 ‘구조적 재설계’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건강보험의 역할은 재정 관리가 아니라 ‘질 중심 구매’로 전환돼야 한다. 즉, 단순 행위에 대한 수가가 아니라, 결과 중심의 지불 방식, 환자 만족도, 적정성 평가 등을 통해 보상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는 미국의 MIPS(Merit-Based Incentive Payment System), 네덜란드의 인센티브 계약모형 등과 유사하다. 또한 민간의료기관의 공적 역할을 인정하고, 일정 수준의 자율권을 보장하는 ‘책임계약’ 제도도 도입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비급여를 제한하고 실손보험과 병원을 이간질하는 방식으로는 장기 지속이 불가능하다.
- 향후 의료정책연구원이 중점적으로 추진할 과제는.
= 첫째는 ‘건강보험 개편 종합모델’ 수립이다. 앞서 언급했듯 현재의 건강보험 구조는 한계에 봉착했으며, 근본적인 개혁 없이는 재정도, 진료도, 신뢰도 모두 지속될 수 없다. 의료정책연구원은 2026년까지 건강보험 급여범위 조정, 비급여 제도 재정의, 실손보험과의 연계 방안, 공·사보험 역할 분담 등을 포함하는 정책 프레임워크를 마련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법제도 개선, 재정 시뮬레이션, 제도 이행 로드맵까지 포함된 총괄안을 제시할 계획이다.
둘째는 ‘필수의료 생태계 복원’이다. 이를 위해 외과계 전공의 인센티브, 지역 필수의료 인력 유입 장치, 필수의료병원 별도 지정 및 재정 지원 방식 등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 중이다. 이미 시범사업을 제안한 바 있으며, 일부 지자체와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셋째는 ‘의료법·면허제도 개혁안’이다. 기존의 면허관리제도 개편에 더해, 징계권의 자율화, 의료사고 중재제도의 공정성 제고, 응급의료책임의 명확화, 전공의법과 의료법 간 충돌 조항 해소 등이 대상이다. 이는 단순히 면허기관 하나 신설하는 문제가 아니라, 의료전문직 전체의 사회적 책무성과 자율성의 재정립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1차의료 전달체계 강화’, ‘의사 노동환경 개선’, ‘의대 교육과정 개편’, ‘지역공공의료와 민간병원 협력모형’, ‘AI 및 디지털 헬스 법제화 대응’ 등도 향후 중장기 연구 대상에 포함된다. 의료정책연구원은 단기 분석이 아니라 구조 개혁 중심의 정책 제안 기관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 의료계 구성원과 국민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
= 의료정책은 단순히 정부가 만들어 의료계가 따르는 구조로 작동할 수 없다.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들이 참여하지 않은 제도는 오래가지 못한다. 제도는 설계 이전에 철학이 있어야 하고, 실행에는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 의료정책연구원은 단지 문제를 지적하는 조직이 아니라, 해법을 연구하고, 실행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기관이 되고자 한다.
또한 국민에게도 당부하고 싶다. 의료는 수혜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구축하는 공공재이다. 전문가의 책임과 국민의 참여가 함께 작동해야 지속가능한 제도가 만들어진다. 의료정책연구원은 앞으로도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의료의 미래를 준비하겠다. 의협 회원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언제든 정책 의견을 제시해달라. 연구원은 항상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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