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주(인사이트9코리아 대표이사) 

[라포르시안] 최근 K-메디컬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국내 의료기기산업이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정작 업계에서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규제로 인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의료기기 GMP(우수제조관리기준) 제도에서 ‘제조자’ 정의를 둘러싼 혼란은 업체에 상당한 부담을 주고 있으며, 글로벌 진출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국제 표준인 ISO 13485에서는 ‘제조자’(Manufacturer)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다. 의료기기를 설계·제조·포장하거나 본인 명의로 시장에 출시하는 조직을 의미한다. 핵심은 ‘자신의 명의로 시장에 출시’하는 주체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의료기기법은 ‘제조업자’와 ‘제조의뢰자’를 별도로 구분한다. 제조업자는 실제 의료기기를 만드는 업체이고, 제조의뢰자는 제조를 의뢰하되 자신의 상호나 상표로 판매하는 업체를 말한다. 얼핏 보면 합리적인 구분처럼 보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여러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첫째 책임 주체가 모호하다. ISO 13485에서는 하나의 제조자가 품질시스템부터 시판 후 안전관리까지 모든 책임을 진다. 하지만 한국 제도에서는 제조업자와 제조의뢰자 사이에 역할이 애매하게 분산돼 있다.

품질시스템을 누가 구축·관리해야 하는지, 제품 결함이 발생했을 때 누가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지 불분명하다. 게다가 ‘critical supplier’를 제조자로 확장해서 보는 개념은 이중 삼중으로 제조자가 꼬리를 물고 이어져 GMP 심사를 부품 공급자가 받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둘째 해외 진출 때 큰 혼란이 발생한다. 미국 FDA나 유럽 CE 인증을 받으려면 명확한 제조자 표기가 필요한데, 한국의 이원화된 체계로는 설명이 어렵다. 실제로 많은 업체가 해외 인증 과정에서 ‘도대체 누가 진짜 제조자인가’라는 당혹스러운 질문을 받기도 한다.  

셋째 행정절차가 복잡하다. 위탁제조 관계에서 변경 승인이나 신고할 때마다 제조업자와 제조의뢰자 중 누가 해야 하는지 헷갈린다. 같은 내용을 중복으로 신고하거나 서로 미루다가 시기를 놓치는 경우 또한 빈번하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중소 의료기기업체에 더욱 가혹하다. 대기업과 달리 법무팀이나 인허가 전담 부서가 없어 복잡한 규제를 해석하고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중소업체가 규제 해석을 위해 외부 컨설팅 비용을 지불하고 있으며 이는 고스란히 개발비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 중소 의료기기업체 대표는 “제품 개발보다 인허가 절차가 더 어렵다”며 “같은 제품을 해외에 수출할 때와 국내에 판매할 때 서류가 달라 이중 부담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물론 해법은 있다. 문제 해결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첫째 ▲ISO 13485: 자신의 이름이나 상표로 시장에 내놓는 자가 제조자 ▲EU MDR: 환자 안전성과 성능에 최종 책임을 지는 자가 제조자 ▲IMDRF: 규제의 일관성을 위해 시판 허가 보유자를 제조자로 정의 ▲FDA: 상업적으로 책임을 지는 자가 Manufacturer, 공장은 Contract Manufacturer로 별도 분류 등 국제 표준에 맞춰 용어를 통일하고, 책임 체계를 명확히 하면 된다.

이를 위해 먼저 제조업자와 제조의뢰자 구분을 폐지하고, ISO 13485와 동일한 ‘제조자’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실질적으로 제품에 대한 책임을 지는 주체를 제조자로 명확히 규정하고, 실제 생산을 담당하는 업체는 ‘제조업체’ 또는 ‘생산업체’로 구분하는 것이다. 

둘째 주체별 의무와 책임을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제조자는 품질시스템 구축, 시판 후 관리, 최종 책임 등을 담당하고, 생산업체는 위탁받은 범위 내에서의 제조 품질만 책임지도록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셋째 기존 허가 제품에 대해서는 충분한 유예기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전환하되 새로운 제도에 대한 상세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야 한다.

국내 의료기기업체들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려면 국제 표준에 부합하는 규제 환경 조성을 선행해야 한다. 독자적인 규제 체계를 고집하다가는 K-메디컬의 성장과 혁신을 스스로 저해하게 될 것이다. 정부는 규제 개선을 통해 의료기기 업계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지원해야 한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제도로 업체들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고 합리적인 규제로 혁신을 뒷받침해야 한다. 의료기기 GMP 제도 개선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정부와 관련 기관들이 인식하고 하루빨리 개선 작업에 나서기를 기대한다. K-메디컬의 진정한 도약은 규제 대응과 같은 기초 체력을 탄탄히 다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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