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수(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보험위원회 부위원장)
[라포르시안] 인공지능(AI)에 대한 기대와 위기감이 동시에 커지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난 8일 대통령 직속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가 공식 출범하면서 AI 3대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행동계획을 본격적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당시 약속한 ‘대통령 주도 AI 거버넌스’ 구상을 현실화한 것이다. 또한 정부 부처별로도 연이어 AI 관련 정책을 발표하고 있으며, 헬스케어 분야 역시 중요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특히 AI는 기술 개발뿐 아니라 의료 제도 운영 전반에서의 활용 가능성도 주목받고 있다. 올해 6월 미국 FDA는 임상 프로토콜 검토와 과학적 평가를 가속화하기 위해 생성형 AI ‘엘사’(Elsa)를 도입했다. 이 시스템은 심사자와 조사관 등 직원들이 더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도록 설계돼 FDA의 기능 현대화와 국민 서비스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엘사는 임상시험 설계 검토를 단축하고 우선순위 검사 대상을 식별하며 의사결정 과정을 지원한다.
최근 소식에 따르면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 역시 AI 기반 의료기기 허가·심사 시스템을 구축해 규제과학 효율성과 정확성을 높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는 글로벌 규제기관들이 앞다퉈 AI를 제도적 도구로 채택하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의료기기 분야에서 AI가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은 어디일까.
아마도 의료기기 산업계가 겪는 가장 큰 난제 해결에 적용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국내 의료기기 산업계가 겪는 가장 큰 난제 가운데 하나는 ‘신의료기술평가’(HTA) 제도다. 식약처로부터 시판 승인을 받은 제품이라도 신의료기술평가 단계에서 발목이 잡히면 실제 시장 진입이 지연되거나 불가능해진다. 이에 따라 ‘선진입·후평가’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산업계 요구가 꾸준히 제기됐다.
해외의 경우 미국 FDA 510(k)·PMA(Premarket Approval·시판 전 허가) 승인이나 유럽 CE 마크를 받으면 곧바로 시장 진입이 가능하다. 반면 국내 제조기업들은 국내 제도의 문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경쟁해야 하는 실정이다. 물론 해외 의료기술평가제도 역시 비용효과·비용효용 분석 등 고도화된 의료경제성 평가를 요구해 기업 입장에서 결코 만만치 않다.
이처럼 복잡하고 불확실성이 큰 문제에 대해 AI를 활용하려는 시도는 이미 해외에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영국 국립보건임상평가원(NICE)은 2022년 ‘보건기술평가 혁신연구소’(HTA Lab)를 설립했다. HTA Lab은 새로운 의료기술 도입과 평가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업계·학계·규제기관·환자단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협력하고 있다. 특히 올해 8월 시작된 두 가지 프로젝트가 이목을 끌고 있다.
첫째 ‘의료기술평가에서의 AI’ 프로젝트는 생성형 AI 기법이 의료경제성 모델링의 ▲개념 설계 ▲데이터 입력 ▲시뮬레이션 ▲검증 전 과정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둘째 ‘AI와 함께하는 의료기술평가의 미래’ 프로젝트는 자동화와 예측 모델링·추론 시스템 등 첨단 도구를 NICE 평가 프로세스에 접목해 효율성과 대응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특히 HTA Lab은 단순히 기술적 가능성에 머물지 않고 체계적인 문헌 고찰을 통해 근거를 축적하고 있다. 또한 이해관계자 워크숍을 열어 AI 도입 때 예상되는 도전과제와 윤리적 쟁점을 논의한다. 예를 들어 ▲알고리즘의 투명성 확보 ▲데이터 품질 관리 ▲환자 개인정보 보호 ▲자동화된 의사결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책임소재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뤄진다.
이러한 논의는 단순히 연구 차원을 넘어 실제 적용 가능한 모범사례 원칙을 만드는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영국은 또한 AI가 단순히 비용 절감 도구에 머물지 않고 ‘혁신 가속화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새로운 의료기술의 평가와 도입 속도를 앞당기는 동시에 임상적 안전성과 비용 대비 가치를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이중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국내 의료기기 산업계가 직면한 과제와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최근 연구 논문들은 생성형 AI의 의료경제성 평가 활용이 아직 초기 단계임을 보여준다. 정식 출판된 사례는 부족하고, 검증된 연구도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미 모델 설계와 최적화·결과 보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 만큼 궁극적으로 ▲효율성 제고 ▲비용 절감 ▲사용자 경험 개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실행 가능성과 투명성 및 방법론적 엄격성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윤리적 장치가 함께 마련된다면 AI는 의료기술평가의 판도를 바꾸는 도구가 될 것이다. 결국 의료기기 기업들이 AI를 활용해 더 쉽고 효율적으로 의료기술평가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다면 우리나라 의료기기산업 경쟁력 확보에도 열쇠가 될 것이다. 특히 자원이 부족한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의 경우 혜택은 훨씬 더 클 수 있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AI가 어디까지나 ‘도구’라는 사실이다. 임상 근거 창출에 대한 투자와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정교한 도구라도 무용지물에 불과할 뿐이다. 좋은 조리도구가 있어도 신선하고 질 좋은 재료 없이는 훌륭한 요리를 만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앞으로 AI는 의료기술평가 과정을 바꾸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특히 문턱을 낮추고 속도를 높이며 평가 신뢰성·투명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환자와 사회 전체에 더 나은 가치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우리나라 역시 제도적 혁신과 실증적 연구를 병행해 이 흐름에 발맞춰야 한다. AI를 단순한 유행이 아닌 의료 혁신의 핵심 파트너로 만들 수 있을지가 향후 몇 년간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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