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미(한국로슈진단 전무)

[라포르시안] 규제당국과 의료기기 산업계는 오랜 시간 ‘규제 조화’를 위한 논의를 이어왔다. 동일 제품이 국가마다 다른 위험 등급으로 분류되는 규제 불일치는 다소 진부한 주제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들여다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지난 9월 15일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국제의료기기규제당국자포럼(IMDRF)-산업 공동 워크숍에서는 각국 의료기기 등급 분류의 상이성에 따른 문제점과 개선 방안이 논의됐다. 이 자리에서 브라질 규제기관(ANVISA)은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해법으로 ‘상호인정’(Reliance) 제도를 발표하며 규제 조화와 각국 주권의 현실 사이에서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팁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혁신적 기술의 의료기기가 인류 건강을 더욱 빠르게 증진하는 시대에 우리는 글로벌 표준과의 규제 조화 노력을 펼쳐 왔다. 하지만 다양한 이유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불일치는 기업에 단순한 행정적 비효율을 넘어 혁신 기술 도입을 지연시켜 결국 환자의 귀중한 시간을 앗아가는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면 왜 각국 의료기기 등급은 같을 수 없을까? 이는 의료기기를 여러 나라에 출시하고자 할 때 단순히 ‘국가별 제출 서류 체크리스트’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란 걸 알게 된다. 어떤 나라는 비교적 낮은 위험군으로, 다른 나라는 훨씬 높은 등급으로 간주한다. 등급 하나가 바뀌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필요한 임상 증거의 엄격성, 기술문서 자료의 규제 요건, 심사 경로와 타임라인·라벨링 문구까지 줄줄이 바뀌게 된다. 이 때문에 기업은 규제가 복잡하고 예측이 어려운 시장 진출을 포기하거나 출시 시점을 늦추는 전략적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혁신 기술과 의료기기가 환자에게 사용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그 사이 환자는 기존 치료·진단 방법에 의존하게 된다. 의료기기 등급 분류의 차이에 따른 이 같은 현실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 동일 제품이 각기 다른 등급을 받는 이유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이번 IMDRF-산업 공동 발표에서 야샤 황(Yasha Huang) 로슈진단 아시아·태평양 규제 정책 총괄은 실제 데이터를 통해 이 같은 규제 불일치를 객관적으로 제시하고 원인을 설명했다. 

예컨대 로슈진단 체외진단 자동화 분석 장비는 IMDRF 회원국에서 규제 당국별 3단계와 4단계 등급 분류체계가 뒤섞인 가운데 낮은 등급(A등급 또는 1등급)에서 높은 등급(D등급 또는 4등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코로나19와 같은 호흡기 감염검사도 역시 비슷했다. 그는 이러한 규제 차이가 근본적으로 국가별 ‘규제철학’과 ‘환경’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즉, 어느 국가는 의료기기의 고유 위험을 더 크게 보고, 또 다른 국가는 사용환경과 의료진 개입을 통한 위험 완화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국가는 의료기기 단일제품의 위험분류를 중시하고, 또 다른 곳은 장치·시약·소프트웨어·워크플로우 등 시스템 전체에서 위험을 평가한다. 여기에 많은 규제기관이 규제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과거에 이미 확립된 선례를 따르는 경향이 맞물린다.

새로운 안전성 정보나 기술 발전에 맞춰 등급을 능동적이고 신속하게 재평가하는 규제당국이 있는 반면 한번 정해진 등급을 보수적으로 유지하려는 곳도 있다. 이러한 속도와 판단의 차이가 누적되면서 국가 간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이는 인공지능(AI)·머신러닝(ML) 기반의 새로운 기술이나 혁신 기술로 갈수록 더 큰 간극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브라질 ANVISA 발표를 살펴보면 의료기기 등급 조화가 어려운 이유로 각국이 처한 ‘보건의료 환경과 위험 인식’ 차이임을 알 수 있다. 가령 기본적으로 체외진단의료기기(IVD)의 위험 등급을 분류할 때 국제적인 원칙(IMDRF·GHTF)을 따르면서도 자국의 위험 인식, 공중 보건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역학적 상황을 함께 고려한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는 등급 분류가 단순히 제품의 기술적 특성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보건의료적 맥락 속에서 평가되는 ‘상대적’ 개념임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가 뎅기열(Dengue) 진단 시약이다. 브라질에서는 뎅기열이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염병이기 때문에 관련 진단 시약이 국가 방역 체계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더 높은 등급으로 관리할 수밖에 없다. 이는 등급 불일치가 때로는 각국의 국민 보건을 위한 필연적인 선택의 결과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코로나19 자가검사키트는 팬데믹 초기에는 자가 사용이 금지됐다가 공중 보건 상황 변화에 따라 이후 3등급으로 승인됐다.

이를 통해 규제가 기술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반응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ANVISA 사례는 각국 규제당국이 자국의 특수한 상황을 등급 분류에 반영하는 것이 당연하고, 때로는 필수적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글로벌 기업이 겪는 ‘등급 불일치’ 현상이 일부 규제기관의 비합리적인 판단 때문이 아니라 각국의 국민 보건을 위한 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결과임을 시사한다. 

특히 브라질은 자국 시장에 등록된 의료기기의 약 69%가 수입 제품일 정도로 국제 교역 의존도가 높은 시장이다. 이러한 시장 특성은 ANVISA가 규제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된 노력을 줄이며 환자의 신기술 접근성을 가속하기 위한 ‘상호인정’ 제도를 도입한 주요 배경이 됐다.

세계보건기구(WHO) 정의에 따르면 상호인정은 한 규제당국이 다른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의 평가 결과를 상당한 비중으로 고려해 자체적인 결정을 내리는 행위를 말한다. 다시 말해 다른 나라의 결정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규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되 최종 결정에 대한 책임과 주권은 자국이 유지하는 규제 방식이다.

ANVISA는 2022년 관련 일반 규정(RDC nº 741/2022)을 마련한 데 이어 2024년 의료기기 사전 허가를 위한 구체적인 지침(IN nº 290/2024)을 제정하며 상호인정을 제도적으로 공식화했다. 또한 MDSAP(의료기기 단일 심사 프로그램) 정회원인 호주(TGA)·캐나다(Health Canada)·미국(FDA)·일본(MHLW)을 ‘동등한 해외 규제당국’(AREEs)으로 지정하고, 이들 국가에서 허가받은 3·4등급 고위험 의료기기는 ‘본질적으로 동일’하고 ‘포르투갈어 라벨링 등 브라질의 고유한 요구사항을 충족한다’는 조건에서 간소화된 허가 절차를 통해 ANVISA 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미 성숙한 규제 체계를 갖춘 한국 입장에서 ANVISA가 MDSAP 정회원 국가에 대해서만 동등한 해외 규제당국으로 지정한 부분은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이 상호인정 모델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존중하면서도 자국의 규제 주권을 지키고 중복심사를 줄이며, 현실적인 균형점을 찾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규제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환자 안전을 지키고 혁신 가치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브라질 ANVISA 사례를 통해 규제 조화란 모든 규정을 획일적으로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상호 전문성을 인정하고 활용하는 ‘협력’을 통해 달성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료기기 수출입 강국인 대한민국 역시 심사 독립성은 유지하되 신뢰할 수 있는 해외 규제기관의 심사 결과에 공신력을 부여하는 제도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을 돕는 동시에 식품의약품안전처가 혁신적인 신기술 심사에 역량을 집중하고, 혁신 기술이 신속하게 환자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상생 전략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타 국가의 의료기기 등급 분류가 다르다고 해서 비합리적이라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 이면에는 국가별 고유한 보건의료 환경과 사회적 우선순위가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규제기관과의 투명한 소통을 통해 이러한 배경을 이해할 때 비로소 불필요한 규제 장벽과 진정한 위험 관리 사이의 균형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화두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한국 상황에 맞는 규제 조화의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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