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경(엠디써트 본부장)

[라포르시안] 의료기기산업에서 제품개발과 인허가는 상호 독립된 과정이 아닌 긴밀하게 연결된 절차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개발과 인허가를 별개 업무로 분리·추진함으로써 시간적 재정적 손실을 초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수한 제품을 개발하면 인허가는 자연스럽게 뒤따를 것’이라는 전제는 현실적으로 위험하다.

실무에서는 의료기기 초기 개발기획 단계부터 규제 전략을 동시에 수립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의료기기 기업 대부분은 제품 아이디어를 시장 수요나 기술적 실현 가능성에만 기초해 구상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부터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품목 분류, 등급, 해외 진출 때 요구되는 규제 경로를 동시에 검토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단순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의료기기로 판단해 개발을 시작했으나 실제 규제 분류에서는 원재료가 상이한 새로운 의료기기로 지정돼 임상시험 자료까지 요구되는 사례가 발생한다. 따라서 기획 단계에서 인허가 전문가와 협의하지 않으면 제품개발 완료 후 추가 시험과 임상 설계가 필요해 수년간 출시가 지연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ISO 13485(의료기기 품질경영시스템 표준)·ISO 14971(의료기기 위험관리 표준)·IEC 62304(의료기기 소프트웨어 생명주기 프로세스 표준)와 같은 국제 표준은 제품개발 과정에서 작성돼야 하는 계획서, 요구사항, 유효성 검증 등 문서를 명확히 규정한다. 

그런데 다수의 기업은 이를 단순한 품질 시스템의 형식적 요구로 인식해 제품개발 후 일괄적으로 작성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실제 인허가 심사에서는 해당 문서들이 제품의 안전성과 성능 확보를 입증하는 핵심 근거로 작용한다. 

가령 소프트웨어 의료기기의 경우 요구사항 명세서와 시험 결과 간 추적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심사 보완’ 또는 ‘반려’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개발 단계에서 실시간 문서를 작성·관리해야만 인허가 심사 과정에서의 보완 자료 요구를 최소화할 수 있다. 특히 개발이 마무리되는 단계에서 실시하는 안전성 시험과 성능시험 등은 인허가 절차의 핵심 관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종종 국내외 규제기관이 요구하는 최신 시험 규격과 기업이 실제 수행한 시험 조건이 불일치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대 의료기기의 생물학적 안전성 평가를 위한 ISO 10993 시험에서 triplicate extraction(삼중 추출)이 요구됨에도 단일 조건으로 시험을 완료한 경우, 혹은 IEC 60601-1 전기안전 규격의 최신 개정판을 반영하지 않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경우 동일 시험을 반복해야 하는 만큼 시간과 비용이 이중으로 소요될 수밖에 없다. 또한 새로운 기기에서는 상황에 따라 임상시험이 요구되며, 임상 설계 과정에서 통계적 유의성 확보나 대조군 설정이 적절하지 않으면 식약처뿐 아니라 해외 규제기관에서도 반려될 가능성이 높다.이어 인허가 신청은 단순히 문서를 제출하는 행위가 아니라 제품개발 결과를 규제기관의 언어로 체계적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이때 기술문서 및 첨부 자료는 상호 일관성과 추적성을 갖춰야 한다.

실무에서 자주 목격되는 문제는 ‘자료는 존재하지만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는 개발 단계에서의 문서화 미비와 시험 설계 부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인허가 직전의 대응보다는 개발 초기 단계에서부터 일관된 규제 전략을 병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지막 인허가 획득은 최종 목표가 아닌 새로운 시작점이다. 인허가 이후에는 ▲정기 보고 ▲변경 신고 ▲PMS(시판 후 조사) ▲PSUR(주기적 안전성 보고) 등 다양한 규제 요구사항이 뒤따른다. 이를 간과하면 행정처분이나 판매 중지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의료기기 ‘개발–허가(혹은 인증)–사후관리’는 결코 단절된 절차가 아닌 순환적 구조로 관리해야 하는 연속적 과정이다. 의료기기 제품개발과 인허가는 평행하게 달리는 두 개의 철로에 비유할 수 있다. 어느 한쪽이 방향을 잃거나 지연되면 전체 열차 운행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 의료기기 개발자와 규제(RA) 담당자가 초기 단계부터 긴밀히 협력하고 문서화 및 규격 적합성을 실시간 확보하며 최신 규제 동향을 반영하는 것이 제품 출시와 시장 진입 속도를 결정한다. 우수한 제품은 단순한 기술적 성취에 머무르지 않고 규제와의 체계적 대화 속에서 비로소 허가 혹은 인증받은 제품으로 완성된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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