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혜성(한림대성심병원 간호사)
[라포르시안] 지난해 2월, 정부가 예고 없이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일방적으로 ‘선포’한 이후 1년 4개월이 흘렀습니다. 의대 증원 정책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병원을 집단 이탈하면서 의료현장은 혼란에 빠졌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와 보건의료 노동자들에게 전가됐습니다. 특히 비수도권 지역은 의사 수급에 큰 차질을 빚고 있으며, 의대 교육도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국가가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부실한 ‘의료개혁’을 밀어붙인 결과, 국민의 건강권이 심각하게 침해되는 끔찍한 현실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이런 오류를 반복해선 안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원 노동자들이 안전하고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입니다. 보건의료노동자에 대한 적정 인력 기준의 제도화, 주 4일제 근무제 도입, 전담간호사 제도화 및 불법의료 근절, 직종별 업무범위 명확화 등 실질적인 개혁 방안을 수립해야 할 때입니다.
라포르시안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보건의료노조와 함께 국립대병원, 사립대병원, 지방의료원, 민간 중소병원 등 다양한 현장의 보건의료노동자들로부터 의료현장에서 겪는 고충과 애환을 듣고, 그에 따른 올바른 의료정책 대안을 제시하고자 이 연재를 준비했습니다. 앞으로 총 다섯 차례에 걸쳐 '현장에서' 전해 온 목소리를 연재할 예정입니다(사정에 따라 연재 횟수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저는 경기도의 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간호사입니다. 지금 간호사들은 1년 반 이상 길어진 의정갈등으로 극심한 불안 속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의정 갈등으로 인한 의료 공백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 그 피해가 이렇게 커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태를 누가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을지,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6월 21일 간호법이 시행됩니다. 수많은 논란 가운데 의정갈등으로 불거진 진료지원 간호사가 ‘전담간호사’로 제도화됩니다. 전담간호사 시행을 앞두고 업무범위 명확화, 법적 보호, 체계적인 교육 등등 해결되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지만 정작 현장에 있는 간호사들은 제대로 제도화될지 의문과 걱정이 많습니다. 갑자기 늘어난 인력에 제대로 된 휴식 시간도, 휴게공간도 보장받지 못하고, 교육에 대한 버거움을 안고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현실입니다.
특히 업무범위 명확화는 전담간호사들의 가장 절실한 요구사항입니다. 아직 정착되지 못한 채 의사들의 공백이 생기는 업무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이 복귀한다고 해도 그 혼란은 여전히 현장에 있는 간호사들의 몫입니다. 이에 대한 현장 간호사들의 우려도 큽니다.

현장은 지금 의사들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상황입니다. 남아 있는 의사들마저 떠나고, 병상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환자 설명, 보호자 응대, 응급 상황 관리… 그 모든 공백을 간호사들이 떠안고 있습니다. 의사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주치의 1명당 최소 4명의 진료지원 간호사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불과 몇 달 전 50명~70명이던 진료지원 간호사가 지금 180명 ~ 250명까지 급증했습니다.
경력 간호사들은 진료지원 간호사가 되어 빠르게 그 인원이 늘어나고 있으며, 의료 현장은 다시 신규 간호사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병원 현장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인력부족으로 식사도 거른 채,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하루하루 허덕이는 일상에 허탈감을 느끼며 일하고 있습니다.
한 대학병원에서는 기관삽관을 할 의사조차 없어 응급실 간호사들이 이를 감당하고 있고, 서울의 상급종합병원에서는 중환자실 간호사가 환자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방 병원에서는 간호사 1명이 환자 30명을 돌보는 현실,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의료 현장입니다. 게다가 진료지원 간호사와 일반 간호사 간의 업무 갈등도 커지고 그로 인한 또 다른 스트레스에 직면해 있습니다.
지금 병원은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정책 등의 변화로 병원의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중환자실이 확대되고, 경력 간호사들이 중환자실로 배치되며, 남겨진 현장은 신규 간호사로 채워지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간호사는 환자에게 안정된 간호를 제공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간호사도, 환자도 모두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보건의료 노동자는 업무 과중, 정서적 소진, 인력 부족, 안전 사고에 대한 두려움까지 안고 일합니다. 따라서 줄었던 사직이 지금 다시 증가하고 있습니다.

어떤 병원은 환자가 없어 무급휴가를 보내고, 어떤 병원은 중환자가 넘쳐나 인력을 갈아 넣으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습니다. 외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떠나간 의사들이 환자까지 데려 가면, 그 환자의 변경 업무는 모두 간호사의 몫입니다.
현장에서는 진료지원 간호사에게 의존해 처방을 받고, 간호사끼리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우리나라의 의료체계가 무너지고 있다”라는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이대로 괜찮습니까? 병원과 환자의 안전을 위해 만성화된 인력 부족 문제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이 위기는 간호사 개인의 헌신으로 감당할 수 있는 단계를 이미 넘었습니다.
정부는 3년 전 간호사 1인당 적정 환자 수 법제화, 공공의료 확충, 간호간병통합서비스 전면 확대를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켜진 약속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는 말뿐인 “존중한다”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사태에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지고 국민의 안전과 생명, 그리고 병원의 존폐가 달린 일에 해결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국민의 안전이 달린 일에 국회가 움직이고 이재명 정부가 바꿔야 합니다. 법과 제도로, 보건의료 정책으로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간호사들은 그동안 ‘사명감’ 하나로 여기까지 버텨 왔습니다. 제도적 뒷받침 없이는 더 이상 의료 현장을 지킬 수 없습니다. 곁에 있는 동료들은 늘 사직을 꿈꿉니다.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환자 곁에 머물 수 있도록 이 위기를 끝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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