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보건의료노조 원광대병원지부 부지부장)

[라포르시안] 지난해 2월, 정부가 예고 없이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일방적으로 ‘선포’한 이후 1년 4개월이 흘렀습니다. 의대 증원 정책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병원을 집단 이탈하면서 의료현장은 혼란에 빠졌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와 보건의료 노동자들에게 전가됐습니다. 특히 비수도권 지역은 의사 수급에 큰 차질을 빚고 있으며, 의대 교육도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국가가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부실한 ‘의료개혁’을 밀어붙인 결과, 국민의 건강권이 심각하게 침해되는 끔찍한 현실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이런 오류를 반복해선 안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원 노동자들이 안전하고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입니다. 보건의료노동자에 대한 적정 인력 기준의 제도화, 주 4일제 근무제 도입, 전담간호사 제도화 및 불법의료 근절, 직종별 업무범위 명확화 등 실질적인 개혁 방안을 수립해야 할 때입니다.

라포르시안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보건의료노조와 함께 국립대병원, 사립대병원, 지방의료원, 민간 중소병원 등 다양한 현장의 보건의료노동자들로부터 의료현장에서 겪는 고충과 애환을 듣고, 그에 따른 올바른 의료정책 대안을 제시하고자 이 연재를 준비했습니다. 앞으로 총 다섯 차례에 걸쳐  '현장에서' 전해 온 목소리를 연재할 예정입니다(사정에 따라 연재 횟수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현장에서(1)] "의료체계가 무너진다는 절망감...이대로 괜찮습니까?"  

[현장에서(2)] 누군가의 희생으로 버티는 공공의료, 더는 거부합니다 

[현장에서(3)] 코로나 영웅이라더니...돌아온 건 자부심과 명예 아닌 임금체불

저는 지난 20여년 동안 물리치료사로 병원 현장에서 환자의 건강 회복을 위해 일해 왔습니다.

우리 사회는 현재 급속한 고령화로 만성질환 환자가 증가하고 있고 그에 따라 재활치료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활 전문인력과 시설은 크게 부족한 실정입니다.

병원은 인건비 절감을 위해 인력 채용을 최소화하고 있어 물리치료사들도 과도한 업무량과 열악한 근무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환자와 보건의료 노동자 모두 건강을 위협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병원 현장에서의 재활치료는 1대 1로 진행됩니다. 환자 한 명당 30분 치료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환자 중심의 치료가 되고 있고 적정한 의료질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기준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하게 설정된 환자 수와 업무량, 그리고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물리치료사들은 하루에 수십 명의 환자를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손목, 허리, 어깨 통증 등 근골격계 질환과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있고 이를 견디지 못해 물리치료사들은 병원 현장을 떠나고 있습니다.

인력 부족으로 인해 환자에게 충분한 설명이나 소통은 생략되기 일쑤이며, 치료 시간은 쪼개지고 물리치료사의 전문성도 온전히 발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리치료사 입장에서는 신체적으로 과부하를 감당해야 하며 정신적 소진이 심해집니다. 환자 입장에서는 치료 서비스 질이 낮다고 느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직접 치료 업무 외에 행정업무, 평가 및 기록 작성, 교육 준비, 실습생 관리, 감염관리 업무 등 간접 업무의 비중도 점차 커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로 인해 식사 시간 및 휴게 시간 조차 제대로 확보하기 어려워지며, 쉼 없이 이어지는 과중한 노동은 결국 환자의 안전까지 위협하는 아차사고 위험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비단 물리치료사뿐만 아니라 다른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실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보건의료서비스에 대한 적정 인력 기준이 없기 때문에 의료기관은 어떻게 해서든 인건비 절감을 하기 위해 최소의 인력을 배치하려고 하고, 이는 결국 열악한 노동환경과 보건의료서비스 질 저하로 이어지게 됩니다.

각 직종별 실태를 반영한 인력 기준이 없다면 의료기관이 인건비 절감을 위해 최소한의 인력을 배치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이로 인한 환자 안전 저하, 의료서비스 질 하락, 열악한 노동환경과 높은 이직률 등 현장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보건의료노조가 2021년 9월 2일 보건복지부와 합의한 합의문에 따르면 “직종별 인력 기준 마련을 위해 실태조사와 적정인력 연구를 통해 단계적으로 인력 기준을 마련한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9.2 노정합의의 진정한 의미를 살리고 양질의 보건의료서비스 제공을 위해 보건의료인력에 대한 적정인력 기준을 조속히 마련해야 합니다. 최상의 조건에서 최상의 의료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도록 제도와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정부가 이 과제를 미루고 소극적으로 접근할수록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와 시민들에게 돌아갑니다. 환자의 안전은 적정인력 기준 마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9.2 노정합의는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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